임수경양에 대한 최신부의 관심은 지대하다. 아니 지대한 관심 정도가 아니라 열렬한 사랑이라고 표현함이 더 옳을 듯 하다. 하기야 이 땅의 건강한 젊은 남녀가 뜨겁게 연애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스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일터이다. 그러나 한쪽은 전세계의 이목을 한몸에 받으며 평양축전에 참가했다가 지금은 감옥에 갇힌 몸이 된 예쁜 여학생이요 또 한쪽은 이제 신품 받은지 2년이 채 못된 열정이 불타오르는 젊은 사제인고로 나는 유심히 이들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지난해 7월 TV화면을 통해서 평축에 참가하고 있는 수경양의 모습을 처음으로 대하던, 최신부의 감격스러워하던 표정을 나는 잊을 수 가 없다. 어쩌면 저럴 수가, 「나는 지금까지 뭘 했나」는 등 혼잣말을 연거푸 반복하며 최신부는 그 작은 눈에 눈물까지 내 비쳤었다.
그때만해도 나는 흔히 보통사람들의 어떤 감동적인 장면이나 사건을 접했을 때 저절로 생기는 일시적인 연민의 정을 최신부도 느끼는 것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물론 그 순간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후 최신부는 강론때마다 거의 매번 수경이에 대하여 언급했고 기회만 있으면 『솔아… 창살 아래 네가 묶인 곳』을 목청이 다하도록 진지하고도 성의를 다해 노래하면서 수경이를 생각한다고 토를 달아 설명했다. 그리고는 자주 나에게 세상에서 수경이의 부모를 제외하고는 자기만큼 수경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느냐고 어린애처럼 물어왔는데 그때마다 나는『그래 아마 없겠지』 하는 정도로 입막음을 하곤했다.
그러던 지난 가을 성체대회에도 참가할 겸 육지로 휴가를 나간 최신부가 어느날 밤 느닷없이 내게 전화를 해서 자기는 지금 수경이네 집에 와 있다며 그의 부모와 형제들에게 차례차례 송수화기를 바꿔주면서 소개를 하는 것이었다. 그날 낮에는 서울구치소에서 그렇게도 보고싶던 수경이를 면회했고, 이제 방금 그의 가족들과 함께 가정미사를 드렸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수경이네 집에서 수경이와 그의 가족들을 위한 미사를 드린 것도 육지도 아닌 섬에 살고 있는 자기가 처음이었다는 자랑도 잊지않았다.
휴가에서 돌아와 만나는 사람들에게마다 수경이와 그의 가족들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되풀이 하며 그의 사진까지 보여주는 최신부의 얼굴에서 나는 조그만 가식이나 장난기도 발견하지 못했다. 얼마후 자기가 수경이에게 보낸 편지에 답장이 왔다며 불함엽서를 들고 몇번씩 큰 소리로 읽고 기뻐하는 최신부의 모습은 정말 소중한 보물이나 얻은듯이 보였다. 그때는 나도 최신부가 부러웠다. 편지를 받은 것이 부러운게 아니라 수경이에 대한 최신부의 열정이 부러웠던 것이다. 지난 연말 몇몇 사람들과 송년회를 마치고 최신부와 내가 둘이서만 오붓하게 앉아서 남은 음식에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을 대 최신부는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신부님 저는 지금까지 수경이를 위해서 용돈을 아끼고 아껴 70만원 정도 모았습니다. 이제 내년도에 이동되어 육지로 나가면 저는 이 돈을 가지고 수경이네 식구들에게 싱싱한 생선회라도 한번 대접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수경이에게 따뜻한 옷이라도 한벌 넣어주려 합니다.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겠지요?
그러나 만일에 수경이네보다 더 가슴 아픈 처지에 있는 사람을 먼저 만나면 그들에게 쓸 겁니다』 최신부에게 70만원은 큰 돈이다. 언제 그렇게 모을 수가 있었을까. 그런데 최신부의 다음 이야기에 나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만일에, 만일에 말입니다. 수경이가 만일에 사형을 당한다면 그때는 기필코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 자신있습니다』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니니 술취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최신부는 임수경양이 사형까지야 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실한 계산을 깔고 한번 객기를 부려본것인가? 아니 적어도 내눈에 비친 그이 표정에는 그런 얄팍함이 묻어 있지 않았다. 정말 대신 죽을 수 있을까? 벗을 위해서 혼연히 한 목숨을 바치는 지고한 사랑을 최신부는 터득하고 있는 것인가?
임수경양도 최신부가 그를 생각하는 것처럼 그만큼 최신부를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시는 꼴이라고 최신부에게 핀잔을 줄만큼 우리는 아직 그렇게 통속적이지 못하다. 어디 예수님의 사랑이『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도 너를…』이었는가. 교회가 착한 사마리아사람을 읽으며 세상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사랑은 막연한 대상에 대한 관념적인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상에 대한 실천적 사랑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을 하나의 끈으로 묶을 수 있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하는가라는 문제는 최신부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최신부는 자신의 포부를 이렇게 이야기한다.『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수경이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감옥생활이 장기화되면 그는 점점 잊혀질 것입니다.
그때에도 저는 그를 위해 기도하고 생각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생각해주지 않은 상태에서 외롭게 감옥생활을 하고 있겠습니까. 저는 그런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 싶습니다.
수경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요』 그렇다. 최신부가 지금 서슴지 않고 결심을 토로하지만 또 세월이 지나면 어떻게 변할지 누가 알랴. 그러나 나는 최신부의 그런 아름다운 마음이 끝내 변치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믿으며 90년대 새세대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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