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라주일이 설정된지 22년만에 내년 91년부터 모든 질환자들을 위한 「구환(救患)주일」로 바뀌게 돼 올해로 마지막 구라주일을 보내게 됐다. 이에 본보는 구라사업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나환자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 현대 구라사업의 개척자 다미안 신부의 생애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註>
『이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게되었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골로사이3, 1~4).
다미안 데 페우스트 신부가 선종한지 어언 1백 1년이 가까워오고 있다. 「나병환자들의 사도」라 불리워지는 다미안 신부는 나병환자들을 위해 헌신적인 봉사생활을 하다 자신도 역시 나병에 걸렸고 이 인류의 재앙으로 인해 4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분이다.
현대의 구라사업의 개척자 요셉 데 페우스트는 1840년 트레몰로라는 벨기에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처음 그는 농부가 되어 부모의 농사를 이어받을 계획이었으나 그런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그의 큰형처럼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바랐다.
18세가 되던 해, 그는 예수 마리아 성체의 성심수도회에 입회하였고 그곳에서 다미안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는 신학공부도 채 마치기 전에 하와이 섬으로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원래 그의 큰형이 하와이로 가게돼있었으나 병자들을 간호하다 장티푸스에 걸린 형을 대신해서 선교를 지원한 것이었다.
하와이로 건너간후 그는 1864년 호놀룰루 주교좌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고 이후 몇년간 하와이의 푸나와 코할라지역에서 다른 신부·수녀들과 함께 선교활동을 펼쳤다.
「몰로카이」지옥으로 자원하다
1873년 그는 마이크레주 교로부터 몰로카이 섬에 유배되어 살고있는 나병환자들에 대한 얘기를 듣게되었다. 비참한 나병환자들의 생활에 깊은 감동을 받은 다미안 신부는 이때부터 일생을 이들 나병환자들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같은해 33살의 다미안 신부는 나병환자들의 유배지인 몰로카이 섬으로 떠났다. 당시 이섬은 인간 쓰레기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폴리네시아 전역에서 수송돼 온 나병환자들은 인간으로서 생각할 수 없는 최악의 환경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다미안 신부가 섬에 도착했을 때 그를 친절하게 찾아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많은 이들은 나병의 고통으로 정신이상이 되어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곳에서 자신들이 직접 만든 술을 진종일 마시며 자신들의 비참한 신세를 잊으려 애쓰고 있었다.
다미안 신부를 보자 그들은 욕을 퍼부어 댔으나 다미안 신부는 무슨말인지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곳에 생활하는 환자들의 몽뚱이가 너무 일그러져 그들은 말조차 정확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환자들 한사람 한사람을 위해 기도드리다
그러나 자신들을 위해 자원해서 이 지옥을 찾아온 건강한 신부를 기쁘게 반겨주는 사람도 간혹 보였다. 다미안 신부는 처음 그곳의 상황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나병환자들과 함께 처음 미사를 봉헌할 때 환자들의 곪아가는 환부에서 나오는 악취때문에 그는 거의 기절할뻔 했다. 얼른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눈앞이 캄캄해진 다미안 신부는 그러나 이 환자들 각 사람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도움을 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용기를 가졌다.
다시 힘을 얻어 미사를 봉헌한 후 그는 모든 환자들의 움막을 방문해 보기로 했다. 그들이 기거하는 곳은 형편없는 굴이었다. 이곳저곳에 벌레들이 기어다니고 때와 먼지로 가득찬 움막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웠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다미안 신부는 자주 되뇌었다.『나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도저히 더 못하겠다. 이런 곳은 아무도 견디어 내지못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항상 새롭게 마음을 고쳐먹고 다음 움막을 찾곤했다.
먼저 깨끗한 움막을 짓다
이곳 환자들의 생활을 본 그는 본당신자들을 위해서 가장 먼저 청결한 움막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몇몇 환자들과 함께 나무를 베어 첫 움막을 짓기 시작했다. 팔을 걷어부치고 힘든 일도 피하지 않은채 열심히 일하는 다미안 신부를 본 다른 여러 환자들은 그를 따라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씩 맡아 일하게 되었다.
움막들이 거의 다 지어지자 다미안 신부는 떠돌이 환자들을 불러모아 그들의 잠자리를 마련해주었다. 폐허가 된 병원도 수리했고 환자들과 함께 밭을 갈기 시작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최소한의 필요한 양식을 얻고 또 환자들이 그들의 고통을 잠시라도 잊을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당시에는 나병을 치유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없었다. 그러나 다미안 신부는 환자들에게 약을 발라주고 환부를 깨끗이 씻어줌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들어주고자 애썼다. 그들을 만질때마다 나오는 구역질을 이제는 참을수 있게 됐다. 아이들에게 공부도 가르쳤고 마침내 새롭고 더 큰 성당을 마을에 지을수 있게됐다.
돈과 새로운 협조자가 필요한 섬
그동안 그는 의복·약품·양식을 위해 돈을 구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청교도적 개신교 정부와 마찰을 빚고 있었고, 보건성에서는 다미안 신부가 섬을 떠나는 것을 한동안 금지시키며 아무도 그를 방문하지 못하도록 조처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미안 신부가 몰로카이 섬에서 봉사활동을 벌리고 있다는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자 세계 여러곳에서 헌금과 물품을 보내왔다.
어느날 외부의 의사가 이 섬에 나타났다. 그는 오래 머물지 못했고 그 후임자도 얼마 못있어 그곳을 떠났지만 한상 새 의사가 찾아왔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다미안 신부를 가장 열심히 도와준 사람은 신자 간호사들이었다.
“끝까지 내 아이들 곁에서”
다미안 신부는 마을과 병원에 깨끗한 물을 보내주기 위해 우물까지 수도관을 설치 하기도 했다. 그러던중 1884년 다미안 신부는 나병에 전염된 것이 의사의 검진으로 확인됐다.
그는 이제 환자들 중의 한 환자, 문둥병자 가운데의 한 문둥이가 되었다. 주교님까지도 고향으로 돌아와 줄 것을 부탁하였지만 그는 자신의「아이들」곁에 계속 머물겠다고 대답했다.
그는『내가 병을 고치기 위해 이 섬을 떠나야 한다면 그리고 내 과업이 미완성으로 남아 있게 된다면 나는 차라리 건강해지고 싶지 않다』고 하며 나병 환자들을 더 열렬히 사랑했다.
그는 옆에 있는 다른 나환자에게『내 병이 내 몸을 앗아간다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다른 육신을 주실 것이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 육신생명을 희생한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하겠느냐!』고 말하며 그의 깊은 신심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다미안 신부는 병이 악화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일을 했다. 나중에는 옛동료인 람베르트 콘라디 신부의 도움을 받아가며 일을 계속 하기까지 했다.
1889년 4월 15일 다미안 신부는 몰로카이 섬에서 선종했다. 공포의 몰로카이 섬은 다미안 신부의 헌신으로 이제 그 악명을 벗어버리게 되었다.
다미안 신부의 죽음이 알려지자 런던의 데일리 텔레그라프는『이 세상에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난 용기와 헌신 그리고 기쁜 마음을 지닌 다미안 신부는 이 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복자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는 죽음을 극복했다』라고 다미안 신부를 극찬했다.
다미안 신부가 임종할 때 그의 모든 손가락은 허물어져 있었으나 그가 매일 성체를 만지던 첫째 마디는 온전히 남아있었고 사제서품 때 성유를 바른 손바닥도 깨끗하게 남아있었다고 한다. 다미안 신부의 유해는 그가 몰로카이 섬에 도착해서 첫날밤을 지낸 판나누스 나무 아래 묻혔다. 1936년 벨기에의 한 농부의 아들인 다미안 신부의 유해는 국가원수에게 주는 예우를 받으며 미국전함에 실려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뢰벤의 그가 속한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나병환자에 대한 새롭고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모범을 따랐다.
「유배의 섬」몰로카이의 오늘
미국 하와이에 속하는 몰로카이 섬은 길이가 약1백㎞, 폭이 30㎞로 되어있는 대부분의 식물이 메말라버린 초원지대이다. 절벽과 바위들이 많아 그 당시는 어느 곳에도 배가 닿을 수 없었고 그래서 외부에서 수송돼오는 환자들은 그대로 바다에 던져 졌다. 수영을 할수있는 사람들만이 그나마 해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그곳은 안내원이 있어야만 방문이 가능하다. 지금도 90명의 나병환자가 살고 있으며 의사 1명과 5명의 간호사가 봉사활동을 펼치고있다.
새로운 나환자들은 이제 이 곳으로 보내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고있는 환자들이 모두 죽은 후에 이곳은 역사적인 자연공원으로 조성될 계획이다.
<기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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