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꽃이 온 산을 뒤덮고, 나뭇가지마다 밤새 눈보라가 날리어 그 바람 속에 점점 깊어만 가는 겨울의 향기가 퍼지는 아침마당을 나서면 가슴 깊숙히 쏟아져 들어오는 겨울바람에 온 몸이 시리다.
산 중턱에 자리잡은 이 성당은 유난히 춥다. 얼음장처럼 굳게 얼어붙은 대지위에 새 해, 새 날은 어김없이 밝아왔고 새 아침을 맞은 지가 어제 같은데 벌써 보름이 지났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나이 수만큼이나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진다.
뒤 돌아보면 참으로 세월은 빠르다. 머리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으니…. 신부가 되겠다고 국민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어머니 품을 떠나 소신학교에 입학했던 때가 언제였던가!
사제로 서품되기까지 15년이란 긴 세월을 보내며 해마다, 학기마다 신학교를 떠나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신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하느님의 성소요 기적임을 늘 잊지않고 있다. 이렇게 저렇게 잊혀져간 친구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눈 덮힌 산을 바라보며 옛날 친구들과 고달팠지만 그립고 그리운 추억이 신학교 시절을 생각하다가 문득 나는 얼마전에 있었던 참으로 가슴 뿌듯했던 일이 생각나 혼자 미소짓게 되었다.
한달에 한번씩 있는 유아세례식을 마친 후 아이들의 가족과 기념사진을 찍고 밖으로 나오니 세례받은 남자 아기 4명의 부모와 대부, 그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합창이라도 하듯이『신부님! 우리 비오가 신부님이 될 수 있도록 안수기도 해주세요!』『대건 안드레아, 루도비꼬, 야고보도 함께요』유아세례를 수없이 집전하였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모두 하느님의 종으로 자녀를 내어놓겠다고 하는 예가 없었던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들은 번갈아 가며 왜 하느님께 자녀를 봉헌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비오 어머니가 막내를 본지 9년만에 뜻하지도 않은 아이를 갖게 되었다.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는다는 일이 생각만큼 쉬운일이 아니어서 나름대로 많이 고심을 했다고 한다. 어떻게 할까? 차마 결정(?)을 짓지 못한 채 점점 무거워지는 몸으로 성당 계단을 오르내리며 9일기도, 54일기도를 바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니 아들이면 신부님으로, 딸이면 수녀님으로 하느님께 바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이 서너명씩 있으면서 또 아이를 낳는 일이 인간적으로 볼때 얼마나 이 시대에 맞지 않는 미련하고 어리석은(?)일일까? 마치 죽음과도 가은 끔찍한 일이라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요, 흐뭇해 하실 것을 생각하니 순 인간적인 계산을 신앙의 힘으로 떨쳐버릴 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비오 어머니는 9년만에, 대건 안드레아 어머니는 7년만에, 야고보와 루도비꼬 어머니는 6년만에 생각지도 않은 때에, 덤으로 얻은 하느님의 아들이니 인간적 걱정도 있었지만 감사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세례를 받으며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기로 마음을 결정하니 한없는 기쁨을 이루 말할 수 없노라고 말하는 4명의 아기어머니들의 굳건한 신앙심을 통하여 나타내보이시는 하느님의 섭리는 오묘하고 신비스러움을 또 한번 깨닫게 되었다.
하느님 등에 업혀 사는 내가 이 장한 어머니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 부모와 아이들을 위해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일 이외는 없었다.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뇌하며 방황했는지를 당신은 잘 아십니다. 여러 자녀를 키우기 위해 겪는 가정 형편의 어려움은 물론이요, 인간적으로 어리석어 보이고, 사회적으로도 여러 제약을 받을 것입니다. 그때 그때마다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당신의 크신 뜻을 받아들인 부모들의 신앙결단을 높이 사 주십시오. 특히 이 어머니들이 하느님의 뜻에 맞게, 하느님 편에 서서 살려고 하는 정성을 굽어 살려주십시오. 이 부모들의 소망과 이 아기들의 사제성소가 변하지 않도록 항상 지켜주시고, 돌보아 주십시오. 하느님은 무엇이든 하시고자 뜻만 정하시면 이루시는 분임을 믿사오니 이 부모와 가족들로 하여금「전능하신 분께서 우리에게 큰 일을 이루셨다」라고 변함없는 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항상 돌보아주십시오』
아이를 업고 안고 성당을 떠나가는 부모들의 뒷모습을 보며 성당 앞 아파트 단지를 내려다 보았다. 저 아랫 마을에 사는 많고 많은 교우들 중에 얼마나 되는 교우들이 하느님의 법과 뜻을 하느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분평에 서서 살고 있을까?
사제생활을 하면서 보람을 느낀 일도 많았지만 이 네명의 부모와 아기들의 이야기는 나의 사제생활에 큰도움과 위안을 주리라 믿는다.
사제 서품 전『늘 새해 첫날 아침처럼 기도하고, 매 미사 때마다 마지막 성사집전이다』라고 생각하라시던 고 최민순 신부님의 말씀이 새삼 가슴을 뜨겁게 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철저한 사제생활을 하라. 너희의 뜻보다 먼저 하느님의 뜻을, 교우들의 뜻보다 먼저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라」고 하시던 신부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나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우선순위가 되는 또 한해를 시작하며, 삼백육십오일 아침마다 새해첫날 아침처럼 기도 올릴줄 아는 사제이기를 다짐해 본다.
당신의 뜻이라면 기꺼이 순종하리라던 그 부모들보다 하느님의 총애를 받는 사제이기를….
시린손을 불며 두손에 가득 흰눈을 뭉쳐 뒷산 나뭇가지를 향해 힘껏 던졌다. 몸부림치듯 산발을 하며 눈가루가 빈하늘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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