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부터 김동은 신부(서울 신당동본당주임)의 ‘금주의 복음’이 끝나고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조광호 신부가 집필하는 ‘복음단상’을 연재합니다.
▨하나: 그 어디선가 잠시 만났다가 헤어진 사람이지만 오랜 세월을 두고 은은한 빛과 향기가 되어 우리 내면에 되살아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계획이 드러나는 구세사의 대장정을 서술한 성서에서도 잠시 등장했다가 홀연히 사라지면서도 그 인상을 세세대대로 전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앞둔 무교절 첫날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께 “해방절 준비를 어느 곳에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성 안으로 가시오, 어떤 사람이 물동이를 지고 마주올 것이니 그를 따라 가시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예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은 다 이루어 졌다고 마르코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마르 14,12-16).
바로 이 대목에서 ‘물동이를 지고 마주 오는 사람’도 앞서 말한 대로 드러나지 않은 사람이지만 아름다운 여운을 남겨주는 사람입니다.
이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든 마르코 복음사가의 의도적 서술이든 간에 예수의 최후만찬과 물동이를 지고 오는 사람과는 도대체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왜 하필이면 물동이를 지고 오는 사람일까? 하는 의문은 적어도 나에게 큰 호기심을 자극시키고 있습니다.
▨둘: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였을까요. 어떤 학자들은 그가 예수의 친척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성서는 그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과 나이, 직업과 출신성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가족의 밥을 짓고, 차를 끓이고, 목마른 나그네의 갈증을 풀어주기 위하여 가득히 담긴 물동이를 메고 오던 이 사람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위해서 자기 이층방을 빌려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생명을 길러주는 물이란 무엇입니까? 물이란 것은 생명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창조의 그 첫 순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 모든 인류에게 끊임없이 베풀어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 중에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생명의 선물을 어깨에 메고 기꺼운 마음으로 조용한 저녁햇살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이 평화로운 광경을 눈에 그려 보면 그의 양 어깨위에 걸린 물동이의 무게만큼이나 든든한 미쁨으로 그날 그 저녁나절의 햇살을 더욱더 밝고 눈부시게 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적어도 이 사람은 높은 지위에서 권력을 한껏 누리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이 사람은 헤드레일에는 아예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허명(虛名)에 사로잡힌 사람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기 집 다락방을 아무런 조건 없이 선뜻 내어준 이 사람은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살아 있는 모든 것에 경외심을 가지고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자기 자신을 편히 내맡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이웃과 자신을 견주어 초조한 조바심으로 까닭 없이 나서기를 좋아하거나 타인의 그늘 아래로 비겁하게 숨어드는 그런 사람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높은 목소리에 취하여 자기 분수를 넘어서서 환상 속에 자신을 내 맡기는 사람도 아니었을 것이고, 자기의 믿음을 말로써만 간증하는 허풍쟁이 신앙간증자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몰라주는 한이 있더라도 안달하지 않는 믿음의 여유를 지닌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자조적인 패배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학대하고 이웃에게 절망의 높을 만드는 그런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참된 나눔이 어떤 것인지를 가슴깊이 헤아리며 사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셋: 바로 이 사람의 다락방에서 주님의 마지막 고별만찬이 이루어졌음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일치와 봉사, 나눔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기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찬미와 감사(Eucharistia)의 잔치인 성체성사의 원형이 된 최후만찬이 바로 이 사람의 집에서 이루어졌음은 오늘 이 시대 이 땅에 사는 우리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는 참으로 오랫동안 ‘참된 나눔’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물질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간에 남의 몫과 내 몫의 구분이 명쾌하게 되지 않는 사회에 불화와 불안은 끝이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독선(獨善)과 독점(獨點) 독식(獨食)이 만연한 사회에서 말하는 평화란 ‘거짓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모든 구조가 가진 자와 누리는 자들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진 사회, 곧 정의가 구현되지 않은 사회는 ‘법과 양심’ 보다는 ‘폭력과 권모술수’에 의해서 그 사회가 지탱되고 마침내 그로 인해 그 사회는 종말을 맞이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넷: 아직도 ‘참된 나눔’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이 땅에서 ‘같은 빵과 같은 잔을 함께 나누어 먹고 마시는’(코린 11,17-26)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체성사는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빵을 쪼갤 때 비로소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았듯이(루카 24,13-35) 나눔이 없는 공동체의 성체성사는 그 상징이 아무리 화려하고 거창하다해도 그것은 뿌리가 잘려진 싱싱한 과일나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공동체의 믿음은 기복(析福)으로 마취되고, 그들이 부르는 찬송가는 그들의 종교적 심성에 위로는 될지언정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양시쌍비(兩是雙非)로 끝없이 혼란을 거듭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묶인 채 가려진 시야를 간신히 가늠하며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 이 시대’에 저 기쁨과 생명의 물동이를 지고 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묵묵히 수고하며 남의 짐을 진 사람, 그리하여 주님의 해방절을 마련하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불리움을 받고 있습니다. 비록 이들의 이름과 업적은 역사 속에 화려하게 기록되지 않을지라도 바로 이들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은 당신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갈 것이고 바로 이들을 통해서 하늘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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