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이른 봄, 꽃샘추위가 극성을 부리던 날 ○○구치소 여사 주임이 “수녀님, 오늘 꼭 만나주셔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통 말도 안하는 큰 문제의 사람인데 버거스환자입니다. 방 사람들이 빨래까지 해주고 잘 도와주어도 전혀 변화가 없어요. 좀 도와주세요”했다. 그러자고 했더니 잠시 후 부장님이 데리고 왔다.
19세의 용모가 퍽 단정하고 피부색이 희고 고운 미모의 처녀 경화(가명)가 회색 한복 솜바지 저고리를 입고 얼굴을 숙인 채 내 앞에 공손히 와서 앉는다. “이름이 뭐지”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 없다. 재차 묻는 말에 그는 불안한 듯 좌우를 살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의 충동을 느끼면서도 주저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얼른 눈치를 채고 직원을 보고 잠깐 자리를 비워줄 것을 부탁했다.
단둘이 남게 되자 그는 꽉 막혔던 도랑물 둑이 무너진 듯 살며시 얼굴을 들더니 그동안 마음에 응어리진 말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수녀님 사실은요, 입만 벙긋하면 직원에게 고자질 할 것 같아 같은 방 사람들도 믿을 수 없고 겁이 나서 이를 악물고 전혀 말을 안했어요. 나에겐 직원들 모두가 감시원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 항상 불안하고 두려워 아픈 것을 유일한 도피 수단으로 사회 병원을 두 번씩이나 다녀왔지만 그때마다 실패하곤 했어요”하고 말했다. “수녀님 전 어릴 적부터 모든 사람이 밉기만 하고 싫었어요. 아버지는 한쪽다리가 불구이시고요. 엄마는 중국인이어요. 게다가 엄마는 첫째 부인이 아니어서 집에는 배다른 형제들이 많았어요. 자연 그들과 엄마의 사이가 좋아질리가 없지요. 엄마는 한국말이 그다지 익숙지도 못했고 그것은 언니 오빠들로 하여금 더욱 엄마를 무시하게 했어요. 나는 어려서부터 엄마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너무 부끄러웠고 친구들도 걸핏하면 그걸 갖고 놀려대곤 했어요. 상급학교 진학할 때마다 새로운 친구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될까봐 항상 불안하고 초조했지만 어느새 내가 혼혈아라는 것을 안 친구들은 나를 슬슬 멀리하는 눈치이곤 했어요. 그런 상태에서 언니, 오빠들은 모두 공부를 잘했지만 난 언제나 중간이하권의 성적이었고 그건 제게 또 하나의 심한 압박감을 안겨 주었어요. 학년이 올라갈수록 전 모든 것이 저주스럽기만 했고 마음 약하고 말도 잘못하는 엄마, 집안일에 무관심한 아빠, 날 거들떠보지도 않는 언니와 오빠들, 암만해도 가까워지지 않는 친구들, 난 그때부터 반항의 싹을 키우고 있었나 봐요. 그러면서 고3이 되었고 대학 입시를 치르게 되었는데 결과는 뻔한 것이고 난 재수생이라는 딱지까지 달게 되었죠. 완전히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습니다.”
한참 열띤 이야기 중 천주교 담당이 집회 준비가 다 되었다고 데리러 와서 그만 중단하고 기도 해준 후 다음부터 주1회 만날 것을 약속 해주니 그는 밝은 얼굴로 돌아갔다.
오늘 경화가 처음 말하는 것을 본 여사 직원들과 재소자들 모두가 퍽 신기하게 생각하며 생기 돋은 분위기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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