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과 영을 나란히 호칭하는 초기 교회의 신앙고백문 안에서는 호칭의 순위가 있다. 세분이 동등할지라도 서로 구별되고 또 역할과 활동에 있어서 같지 않다. 창조와 구원 사업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역할이 똑같지 아니하다. 세분의 호칭에는 반드시 순위가 있고 또 지켜져야 한다.
◆근원이신 아버지
아버지는 아들을, 그리고 아들에 이어 영을 세상에 파견한 분이시지만 세상안에 파견되시지 않았다. 아버지는 구원의 근원이시며 모든 은총의 기초이시다. 그분은 시작하고 선택하며 부르신다.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은 구원행위를 운동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 모든 운동은 아들의 움직임처럼 아버지에게서 시작되어 아버지에게 귀착된다: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왔다가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간다』(요한17, 28). 인간의 구원이 완전히 성취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게 되는 때 곧 하느님이 『모든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때』이다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 굴복당할 때에는 아드님 자신도 당신에게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하느님께 굴복하실 것이다』 (1고린15, 28).
이런 연유로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느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해 있음을 말과 행위로써 증거하였다:『아버지께
서 하시는 일을 아들로 할 따름이다』(요한5, 19),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다』(요한5, 30). 그리스도는 전적 순종으로써 아버지께의 의존을 드러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의존해 있다. 아버지가 일러 준 바에 따라 그리스도가 가르친 바를 성령은 깨닫고 상기시켜 주며 증언한다:『성령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 주실것이며 또 그분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16, 13). 아들과 영은 세상에 파견되었지만 아버지는 스스로 세상안에 모습을 전혀 나타내지도 들어오지도 않는다. 『아버지는 아들보다 훌륭하시며』 (요한14, 28)사람의 아들조차 모르는 『그 날』을 아버지만이 아신다(마르13, 32).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종의 모습을 취하고 여인에게서 출생한 아들에게 떠맡겨졌다. 아들은 우리의 구원을 선포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동하고 죽음으로써 완성하였다. 구원사업이 아버지로부터 오면서도 그 중심점은 아들인 그리스도에게 있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느님께로부터 왔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해주셨다』(2고린5, 18~19). 영은 아들의 이름과 간구로 인하여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분이다.
◆파견과 순위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영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파견되었다. 파견되기 위해서는 파견된 이가 파견한 이와 구별되어야 하고 또 파견되는 이는 파견하는 이에게 의존해 있다. 아들과 영은 단일성(한분 하느님)에 있어서 동등하고 서로에게 관계를 맺고 있지만 역시 단일성에 있어서 의존하며 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있다. 아들과 영은 아버지처럼 신적 본질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아버지로부터 본질을 받는다: 『나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다』(요한17, 10). 아버지만이 절대적 의미로 어디로부터 나지 아니하신 하느님이다.
순위란 차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별을 뜻하는 것이다. 그것은 구별 안에서의 일치와 단일성을 의미한다. 모든 것의 시작과 완성은 아버지에게 있다. 아버지는 창조와 구원의 주도권을 쥐고 계신다.
그렇다고 해서 아들과 영이 하느님의 행위의 수단이라는 말은 아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하여 영안에서 창조와 구원의 사업을 치셨다. 모든 것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 영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또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 아버지는 근원(…로 부터), 아들을 중재(…안에서)의 역할을 각기 맡는다. 하느님의 사업에 있어서 셋이 맡은 고유한 역할을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구별된다. 아버지는 우리 「위에」, 아들은 우리「와 함께」, 영은 우리「안에」계시는 하느님이다.
◆사랑이신 하느님
요한의 첫째 편지에 의하여 아버지·아들·영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약성서의 가르침이 요약된다:『하느님은 사랑이시다』(4, 9).이 단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사건에서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사랑자체로 나타내셨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계시사건 곧 구원은 아버지·아들·영 사이의 영원한 사랑과 영광과 생명의 친교로서 사람들을 똑같은 친교안에 끌어 들이는 것이다. 예수는 그같은 사실을 십자가상 죽음 직전에 기도로서 표명하였다.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17, 21·26).
구원은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 자신안에 끌어들이는 것 , 즉 하느님과 인간의 결합이다. 이 일치를 위하여 아들이 우리 가운데 사람이되셨고, 죽고 부활한 후에 성령이 파견되셨다.
성령으로 인하여 하느님은 인간 안에 계시게 됨으로써 인간과 화해 및 일치를 이루셨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나누는 완전한 사랑 곧 성령이 인간 안에 들어오심으로써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결합이 성취된다.
하느님이 우리와 관련하여 사랑 자체가 되시기 위하여 아들과 성령이 파견되셨다.
당신 자신 안에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이 실제로 우리를 위한 사랑이 되기 위하여 아들이 강생하셨고 또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나누는 사랑이 실제로 우리를 당신 자신들 안에 끌어들이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이 세상안에 파견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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