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는 예수께서 구세주 그리스도라는 것을 은근히 그리고 단계적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예수께서 자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반대자들과 충돌하는 것을 피하고 일을 그러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인류구원계획은 구약시대에 여러 예언자들을 시켜 미리 알려주었고 특히 말라키야 예언자를 통하여 구세주의 길을 준지할 심부름꾼을 미리 보내리라고 예고하였다.『너를 앞서 내 일꾼을 먼저보낸다. 그는 네 갈길을 닦아놓으리라』 (말라3,1 ) 율법학자들은 이 하느님의 사자를 엘리야 예언자가 (기원전 9세기)다시 온다고 믿었고 그 엘리야는 바로 구원자라고 혼돈하기도 하였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바로 파견되기로 약속된 예언자이며 구세주의 길을 준비할 사람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일러주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간 다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나 보러 광야에 나갔었느냐, 아니면 화려한 옷을 입고 안락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찾으려 나갔더냐』하고 질문하면서 반어법의 표현으로 군중의 주의를 재촉하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요한의 강직한 성품과 정반이고 화려한 옷은 요한의 금욕적인 수도생활과 상치된다.
광야는 불모의 땅을 말하지만 은둔 수도자들의 거처를 뜻한다. 구약시대에는 위대한 예언자들이 광야에서 살았고 그의 말을 들으려 광야로 사람들이 몰려갔다. 그러니 광야에 나가서 사람들이 본 요한은 바로 예언자임을 일깨워주신 것이며 요한은 예언자 중에서도 보통 예언자가 아님을 강조하셨다. 여인의 아들중에서 요한보다 더훌륭한 사람은 없다고 언명하신 것이다. 여인의 아들이란 표현은 사람으로 태어난 자란 뜻이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사업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니 하느님나라의 가장 작은 자 (초대교회 때부터 하느님나라를 교회로 인식하고 있었다.)라도 요한보다 훌륭하다. 이것은 엄청난 사실을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그 보잘 것 없는 예수의 제자들, 그들을 도와 초대교회에서 일하던 평범한 사람들, 그들과 함께 교회안에서 믿음을 같이했던 교우들, 이들이 예수의 구세사업을 이어받아 일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귀중한 가를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사도 바오로도 이것을 강보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발길은 얼마나 고귀한가』 라고 외쳤다. 그들이 모세보다도, 위대한 예언자들보다도, 그리고 요한보다도 더 훌륭하다니 그야말로 알아들을수 있는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다. 『귀있는자 알아들으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비밀스러운 신비를 말씀하실 때에 쓰는 예수의 용어이다.
요한으로 구시대는 끝나고 새 시대가 열리어 하느님 나라가 힘차게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세상에 드러온 하늘나라는 그 출발부터 심한 폭력에 부딪치고 있다. 하느님나라를 준비한 세례자 요한의 투옥을 말하고 앞으로 달칠 당신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교회가 당할 심한 박해를 예견하는 말씀이다.
그러니 이 폭력에 꿋꿋이 견디어 나가는 힘있는 사람만이고 나라에 들어갈수 있다. 요한의 세례를 거절하고 하느님의 계획을 묵살한 바리사이파들과 율법학자들이 폭력의 가해자들이며 하느님의 옳음을 깨닫고 요한의 세례를 받은 양민들과 세리들은 그 폭력을 이겨낸 사람들이다. 하늘나라는 이들의 것이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오르지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고집한다. 하느님까지도 자기들 생각대로 놓아주기를 바란다. 잘못된 것은 하느님의 탓으로 돌리고 잘된 것은 자기들 공로로 돌린다. 광야에서 까실까실한 낙타털옷을 걸치고 소반 (素飯)으로 생활하며 그들에게 회개를 외치는 세례자 요한을 보고는 미쳤다고 지탄하고 (구약의 예언자들을 거부할 때 이렇게 욕했다.) 아무하고나 사귀며 생의 기쁨을 설파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는 주정뱅이라고 욕한다. 자기만 옳고 남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는 이세대, 잘났어 정말. 예수께서는 이 완고한 세계를 장터에서 패갈라 앉아 두 가지 놀이를 하는 아이들과 비겨 꼬집는다. 한 패는 통곡하며 장례놀이를 하는데 아무도 같이 통곡하지 않는다.
또 한 패는 피리를 불며 잔치놀이를 하는데 아무도 장단을 맞추지 않는다. 통곡 놀이는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외침이고 잔치놀이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기쁜소식 전파를 가리킨다.
물론 당시에 이런 놀이를 아이들의 장터에서 한 것은 아니다. 장터는 인생을 가리키고 두가지 놀이는 인생의 슬픔과 기쁨의 양면을 가리킨다. 슬퍼해야 할 때에 같이 슬퍼해야하고 기뻐해야 할 때에 같이 기뻐해야 하는 것이 인간성정의 순리이다. 솔성지유도(率性之謂道) 라 하였거는 슬플때나 기쁠때를 가르쳐주는데 왜 고개를 싹 돌리는가.
울지 못하게 새벽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 날은 샌다. 하느님의 지혜는 그 누가뭐래도 드러난다. 루가는 지혜의 자녀들에게서 나타난다라고 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서 하느님의 지혜가 드러남을 가르치고 있고, 마태오는 지혜의 업적에서 나타난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는 같은 말을 하는 것이고 또 아라메아어에서는 자녀들과 업적은 발음이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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