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입학시험 발표가 시작되면 나는 많은 전화를 주고 받는다. 친지들만이 아닌 청소년들의 희비 엇갈리는 통화를 늦은 시간까지 계속한다. 사흘전 애주는 멀리 쫓아버렸다.
3년 전 애주는 동화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어린이들이 아름다운 꿈을 키울 수 있는 재미있는 얘기를 글로 써서 아주 많은 동화책을 책방에 내놓겠다는 것이다. 허약체질인 것이 안스러울만큼 무엇이나 열심히 하는 애주였으므로 그 꿈도 이룰 수가 있으리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지금도 믿고 있다.
애주는 작년에 졸업한 소녀다. 진학에 실패하고 금년에 재도전했다. 아니 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입학시험을 치르기 며칠전 나는 진정으로 격려하는 말을 해주었다.
발표가 되고 애주는 낙방의 소식을 답답하게 전해왔다. 후기원서는 ○○대학의 것을 사겠노라고 했다. 나는 침착하고 신중한 애주의 태도를 강조했다. 어느 대학보다는 어느 학과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격려했다.
『설마 이번에야…』하는 굳은 신념이 내심중에 일어남을 자각했다. 애주는 학급에서 상위권에 들던 학생이고 작년에 낙방하고 나서도 조용히 받아들이고는 꾸준한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흘전의 전화내용은 전문대학 원서를 사야겠다는 것이었다.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오싹해지는 느낌이었다. 울고불고、좌절하고、원망하는、등등의 소란을 피워야 나도 달래느라 한몫을 할텐데. 애주는 그냥 표정없는 목소리로 『끝까지 해봐야죠』하고는 아무 말이 없길래『내일 만나자!』했다.
어깨가 더 앙상해진 애주는 별로 반기는 눈치도 아니었다.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하나? 반짝이는 눈빛을 되찾을 수가 있을까? 단단히 벼르고 나갔지만 나도 맥이 쭉 빠지는 것이었다.펑펑 쏟아지는 눈송이를 바라만 보는 우리 둘은 질투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선생님 감기 조심하세요』
역시 애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 말도 실은 어제 전화에서 안부를 물었던 얘기다.『애주야…』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준비했던 얘기를 시작했다. 3년전의 발랄하던 애주가 얼마나 귀여운 소녀였으며 내게도 힘을 주었었다는 얘기부터 꺼냈다. 동화작가가 되어 해야할 일들….
『훌륭한 동화작가는 말이다. 좌절 해보는 체험이 중요할 꺼라는 거 너도 인정한댔지? 그래야 청소년의 아픔을 알 수 있거든. 매년 합격자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불합격한다는 이 사실을 슬픈 쪽에서 체험했다는 차이일 뿐이야.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동화작가가 되는데는 달라진 게 전혀 없다는 거야』
『애주야…』
창밖의 눈을 보는지 그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던 애주가 고개를 이쪽으로 가져왔다.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내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는게 여실했다.『선생님 저는요 패배자는 되지 않을래요. 패배자는 글자 그대로 지고만거니까요』
이 아이들을 우리는 어떻게든 붙잡아주어야 하는데、우리들은 어쩌면 이리도 비겁하고 무능하기만 하단 말인가.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