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구 작가가 그린 성녀 박희순(가운데). 절두산 순교 기념관 소장.
박희순(루치아) 성인은 학식을 갖춘 궁녀로서 박해자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신앙을 증거했던 순교자다.
어려서부터 상냥하고 재주와 미모가 빼어났던 성인은 어린 나이에 궁중에 불려 들어가 궁녀로 생활했다. 성인은 총애를 받았을 뿐 아니라 한문과 국문에 능통해 순조의 차녀인 복온공주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30살이 됐을 때 성인은 천주교를 접하고 교리를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인은 궁에서 상궁의 자리에 있어 다른 궁녀들을 보살피고 있었고, 선왕의 위패를 모셔야하는 궁에 있었기에 교리에 따라 살기엔 어려움이 컸다. 성인은 궁에서 높은 지위를 누리면서 생활하는 것이 오히려 하느님을 믿는데 장애가 된다고 여기고 하루 빨리 궁을 빠져나오고 싶어했고, 마침내 병을 이유로 궁에서 나올 수 있게 됐다.
궁에서 나온 성인은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살고자 마음을 굳혔다. 성인은 천주교를 반대하는 아버지를 피해 남대문 밖에 있는 조카의 집에서 살았다. 성인은 그동안 영화와 쾌락 속에서 세월을 허송했음을 후회하고 더욱 열심히 교리를 지켰다. 특히 옷과 음식에 있어 많은 극기를 실천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모범으로 조카와 조카의 가족을 입교시킬 수 있었다.
성인은 이후 같은 궁인 출신인 전경협(아가타)이라는 신자를 만나 그의 집으로 이사해 함께 생활했다. 성인은 몇몇 신자들과 함께 모여 서울의 큰살리뭇골(현재의 을지로4가·산림동·입정동의 일부)이라는 동네에서 살았다. 그러나 1839년 포졸들이 그곳에 들이닥쳐 신자들 모두가 체포되고 말았다.
성인은 포졸들의 급습에 “이는 천주의 성스러운 뜻”이라고 의연하게 말했다. 이어 집안에 있던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포졸들에게 술과 안주를 내 대접한 다음 옥으로 끌려갔다.
포장은 성인에게 “궁녀는 다른 여자와 달리 높은 교육을 받았는데 이러한 사학을 믿을 수가 있단 말이냐”고 꾸짖었다. 그러나 성인은 “천주교는 절대로 사학이 아니”라며 “천주께서는 하늘과 땅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모든 사람이 그로부터 생명을 받았으니 천주를 공경하고 섬기는 것은 사람의 의무”라고 교리를 설명했다. 배교하고 신자들의 거처를 대라고 강요하는 포장에게 교리를 들어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명백하게 설명하기도 했다.
성인은 형관에 불려나갈 때마다 곤장을 30대씩 맞았는데, 결국 다리뼈가 부러지고 골수가 흘러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성인은 “이제야 우리 주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괴로움을 조금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이런 큰 상처에도 불구하고 성인은 스스로 걸어서 다음 문초에 출두할 정도로 인내했다고 한다.
성인은 마침내 5월 24일 옥중의 신자들에게 순교의 길을 걷자고 권면하며 형장으로 향하는 수레에 올랐다.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한 성인의 나이는 39세였다. 성인은 제2대리구 모전동본당의 주보성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