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수난예고이후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공동체가살아 나아가는 정신적이고 윤리적인 지침을 교시하신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예수께서 하직하신 후 내부적인 어려움에 당면하여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자리다툼(136회 참조), 특권추구(137회), 보잘것없는 자들에 대한 멸시(138회), 유혹 등의 갈등을 겪고 있었다.
순진하고 단순한 사람들을 유혹에 빠뜨리기 위하여 덫을 놓은 사람은 앙화를 받아 마땅하지만 유혹을 받는 사람도 사리판단을 옳게 하여 정신무장을 단단히 해야 한다. 유혹은 인간의 사적인 욕심을 자극하여 눈으로 보고 작심하게 하고 일단 작심한 다음에는 발과 손이 동원된다.
인간의 탐욕이 손과 발 그리고 눈을 통하여 범죄화된다는 것은 유대아문학에도 나타나 있지만 그리스도교 수덕학자들의 글에도 되풀이 되었고 우리의 윤리에서도 경계되어왔다.
집회서에 따르면 “악인은 탐욕에 찬 눈을 가지고 궁핍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멸시한다. 욕심쟁이의 눈은 제몫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탐욕으로 자기 영혼을 말라 죽게 한다. 탐욕에 찬 눈은 남의 빵을 탐내지만 그의 식탁은 늘 텅 비어 있다”(14,8-10)라고 한 것을 읽을 수 있다.
손발, 그리고 눈 등 우리의 지체는 온전한 몸으로 온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오히려 영원한 삶을 파멸로 이끄는 도구가 된다면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탐욕을 채우면서 사는 것과 영원한 생명의 나라는 불가상용(不可)의 관계에 있다. 그러니 탐욕은 억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희생을 뜻한다.
이제 탐욕을 채우면서 지옥에 떨어지느냐 아니면 희생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느냐 이것이 문제이다. 그 해답은 자명해 진다. 손발과 눈이 탐욕의 도구가 되어 죄를 짓고 영원한 불속에 떨어져 파멸되는 것보다는 그것 없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생활규범으로서의 이 양자택일의 윤리적 경고는 유대아교 문헌에도 나타나 있다. “내가 잘못하여 다음 세상에서 의로운 내 선조들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보다는 이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리고 저 세상에서 파멸의 불에 타는 것보다는 꺼지는 불에 타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그리스의 철학자이며 의사였던 섹스뚜스 엠피리쿠스도(3세기) 비슷한 뜻의 말을 했다. “복종하지 않는 지체들은 모두 잘라버려라. 그런 지체를 가지고 타락 속에 사는 것 보다는 그 지체 없이 각성하여 사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파멸과 여생의 양자택일을 촉구하는 것이 이들 현자들의 말과 다르다. 이 양자 택일의 경구는 예수께서 간음에 관한 경고를 할 때도 비슷한 말씀으로 표현되었다. 그때에는 “오른 눈과 오른 손이 죄짓게 하거든…”으로 되어있다(마태 5,29-30). 여기서 오른 손이나 오른 눈은 오른 쪽을 소중이 여기는 성서사상을 반영하는 것뿐이고 “네 눈 네 손”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유혹에 넘어가 두 손, 두 발, 두 눈을 가지고 벌 받을 곳은 꺼지지 않는 불속이다. 이 불은 세례자 요한이 이미 경고한 벌이었다(마태 3,12). 이 불은 이사야 예언자가 하느님을 거역한 자들의 주검이 받는 벌과 결부되어 있다. “그들을 갉아먹는 구더기는 죽지아니하고 그들을 사르는 불도 꺼지지 않으리니 모든 사람이 보고 역겨워 하리라”(이사 66,24).
역겨운 구더기가 들끓고 불이 꺼지지 않는 곳을 게헨나라는 곳으로 지명한다. 게헨나는 여호수아서에 이미 나오는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힌논의 아들들의 골짜기라는 곳이다(여호 15,8:18,6). 이곳은 아하즈왕(전 735~715)과 호쉐아왕(전732~724) 때에 몰록신의 우상을 세우고 꺼지지 않는 불가마를 높이 세워 그 신에게 희생 제물로 아들들과 딸들을 불속에 집어넣었던 저주받은 골짜기였다(열왕하16,3:17,17:23,10).
예언자 예레미아가 이 골짜기를 저주함으로서(7,31:19,5-6:32,35) 유대아의 묵시문학에서 마지막 심판 때 악인들이 벌 받는 저주스러운 곳, 지옥으로 통하게 되였다. 죽지 않는 벌레와 꺼지지 않는 불은 앞서 인용한 이사야서와 관련하여 인간이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심한 고통을 표상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실제로는 영원한 파멸을 뜻한다.
이사야서의 죽지 않는 벌레와 꺼지지 않는 불은 하느님의 영원한 벌로 유대아문학에서 알아들었고 (집회 7,17:유딧 16,21), 이 지옥같은 저주의 장소와 대조되는 곳은 시온산의 성전으로 여기서는 하느님께 영원한 예배가 드려진다(이사 66,20-23).
결론의 말씀처럼 여겨지는 말씀: 누구나 다 불소금에 저려질 것이다(마르 9,49)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원문대로는 “누구나 다 불에 저려질 것이다”이다.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지옥에 떨어진 사람은 누구나 불속에서 소금 저려지듯 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원한 형벌 속에 보존된다는 뜻이다. 이 경우에는 다음 절 ‘소금은 좋은 것이다’는 별도의 훈시로 보아야 한다.
둘째로는 많은 유혹 속에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쇠가 불에 단련되듯이 시련을 받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유혹을 당해할 때 경고를 통하여 강해질 수 있고 시련을 받을 때 약속을 통하여 위로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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