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기인(奇人)은 그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있었습니다.
요즘같이 「인기」라는 것이 돈과 출세의 지름길 같이 보이는 세상에는 이러한 기인의 아류나 사이비 기인까지 생겨나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도 합니다.
기인이란 객기(客氣)를 부림으로써 뭇사람들의 시선에 표적이 되는 쇼맨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들의 표적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신적소명에 사로잡힌 자기 자신이라는 점에서 쇼맨과는 참으로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내면에 활화산처럼 폭발되는 진리와 자유, 사랑에 대한 메시지의 자기표현은 일상적인 인간의 언어를 초월하기 때문에 상징적 행위로써만 그 표현이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통속적인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인간들 눈에는 이들의 행적이 「정신나간 사람」 「미친사람」의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기득권자들의 눈에는 이들의 행동이 그들 권위와 안보에 대한 도전으로 보일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기인이 살아남을 수 없는 사회는 일단죽음의 냄새가 풍기는 밀폐되고 폐쇄된 사회라고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둘
「그리스도교적 기인」이란 말이 타당할는지는 모르나 수많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과 함께 그리스도교적 사랑에 포로가 되었던 모든 성인성녀들 또한 기인이라고 할 것입니다. 나는 그 중에서도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를 그 대표적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태리 중부 움브리아 광야에서 어느 나병환자에게 입맞춤으로 시작된 그의 기행은 당시 사람들은 도저히 의해 할 수 없는 「미친사람」의 행적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스스로 걸인이 됨으로써 철저한 무소유(無所有) 속에서 내적인 겸손으로 자신의 내면세계를 무화(無化) 시킴으로써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불길이 되어 타오르도록 했던 프란치스코 성인은 신과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화해시킨 사람이었습니다.
죽음보다 강한 것이 사랑이라고 구약의 시인은 노래했지만 그리스도교적 사랑은 죽음을 뛰어넘는 불사의 에너지로서 영원과 무한을 향하는 신의 속성을 지닌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구체적 현실로 드러날 때 간교하고 약삭빠른 지혜(:奸智)를 「세상사는 지혜」로 여기는 사람들 눈에는 「정신나간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국민학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등수로써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고, 혈연과 지연, 학연으로 저마다의 높은 담장을 쌓고 사는 우리시대, 이렇게 편협하고 폐쇄적인 세계 속에서 형성되는 인간이란 옹졸하고 콕막힌 자기중심적인 인간으로 인간정신의 원활한 불가능해진 사회를 형성한다고 봅니다. 이러한 시대에 소위 출세라는 것은 철장 속에 갇힌 새가 더 화려한 황금철장 속에 갇히기를 원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관념적인 사랑과 진리에 갇혀 자신이 누리는 종교적 권위와 사회적 지위의 자기안보를 위해 절대로 모험을 하지 않으려는 잘못된 보수주의자들 앞에 나자렛 예수의 안주하던 새들에게 난데없이 날아든 야생조와 같아 이른바 일대 혼란과 도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셋
마르꼬 복음사가는 예수 당시 이들 기득권자들이 예수를 향하여 「악령의 두목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저주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 예수의 친척들도 예수를 「정신나간 사람」으로 여겨 예수를 찾아 나섰다가 전합니다(마르꼬 3, 20~25).
가족과 직업(목수)을 버리고 방랑했던 예수, 무식한 어부들과 죄인들(세리와 창녀)과 어울리고 정리되지 않은 열광적인 국수주의자들과 같은 소위 어중이 떠중이들과 함께 돌아다니는 예수는 삶의 보장과 안전을 버리고 일체의 여론에 무관심 한 채 갖은 비방과 모략으로 자신을 없애려는 권력자들 틈에서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선포했던 것입니다. 이 위험천만한 상황을 지켜 본 예수의 친지들은 앞으로 다가올 뻔한 결과를 간파하고 예수를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넷
예수시대의 종교지도자들, 권력을 가진자들, 또 예수의 친지들 모습에서 나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는 무풍지대와 같은 「중산층의 교회 공동체」가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이라면 이들 가운데 어떤 「정신나간사람」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를 찾아 나설까? 아니면 그를 못마땅히 여겨 비난하거나 「얼빠진 사람으로 취급하여 그의 행적을 일소에 부칠 것인가?」하고 나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그리고 나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우리 시대의 석학 칼 러너의 질문으로 대신해 봅니다.
『당신은 아무런 공감도 인정도 받지 못하면서도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바보취급을 당하면서도 이용당한 비참한 감정에 괴로워하면서도 끝내 이웃을 사랑하려고 해본 경험이 있습니까.』다시 말하자면 『당신은 당신의 일상속에서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체험하고 살아갑니까!』하고 우리는 자문 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정신나간사람」 취급을 당하면서도 믿음 속에 자기 자신만이 가질수 있는 소신과 지조를 지키면서 살고자 노력할 때만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미칠 수 있는 자유와 사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험과 도전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미쳐보지 않은 사랑」은 아직도 사랑이라고 말하기엔 이르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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