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의 국제공항에서 평양행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이미 나의 마음은 흥분과 긴장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만6세때에 아무런 영문도 모른채 부모님의 손을 잡고 고향을 떠난지 40년. 소위「1ㆍ4후퇴」라는 피난의 물결속에서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야만 했으며、더구나 나의 경우에는 집안도 부유하게 잘 살고 있었고、그 당시에 어머님께서는 어린 두 동생과 더불어 셋째 동생을 임신하여 몸도 불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버님은 몇가지 귀금속만을 챙기시고는 고향을 떠나야만 하셨던 이유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난 어린 나이였기에 집을 떠나야만하는 부모님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고、남쪽으로 남쪽으로 무작정 걸어가는 피난의 고달픔 속에 서도 묵묵히 따를 수 밖에 없었다.
후에 차츰 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를 알게 되었다.
우리 가족이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 집안은 열심한 천주교 집안이었고 따라서 천주교신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인민의 반역자로 낙인이 찍힐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고향땅을 뒤로하고 남으로 내려온지 40년이 지난 오늘 나는 신부로서 미국땅에서 교포사목을 담당하고 있고 남자 동생 역시 신부로서 서울대교구에서 사목을 하고 있으며、여동생은 수녀로서 교편을 잡고있다. 만일 우리 가족이 북녘땅에 남아 있었다면 과연 천주교 신자로서 생존할 수 있었을까?
온갖 생각들이 머리속을 스치면서 평양행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고 얼마 후에 평양의 순안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나는 평양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우리일 행이 평양을 찾은 첫째목적이 주일미사를 봉헌하는 것이니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미사를 집전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지도원이라는 사람에게 당부했다.
지도원은 『김 선생님이 원하시는대로 해드릴 것이니 염려말라』고 나에게 친절을 보였다.
그러나 나는 신부복으로 정장한 나에게 「김선생」이라고 부르는 지도원의 첫마디가 기분좋게 들리지는 않았다.
천주교가 다시금 신앙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면 그리고 과거에 장익신부나 박창득신부에게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도록 허락하고 김수환 추기경을 북쪽으로까지 초청한 북한 정부당국이 소위 국제 관광단을 안내하는 지도원들에게 사회 신분에 알맞는 호칭조차 가르치지않았다는것은 아무리 좋게 받아들 이려해도 납득이 가지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나개인의 생각을 가지고 그들의 신경을 건드리고 싶진 않았다.
북한 신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좀 더상세하게 서술하기로하고 지도원들에 대한 언급은 여기서 줄인다.
평양시에서 가장 호화롭다는 고려호텔에 우리일행을 안내한 지도원에게 나는 다시 한번 더 미사에 관하여 연질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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