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통치 않은 글쓰기로 밥을 먹는다는 멍에를 쓴 덕분에 뜻하지 않게 종교를 접하고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됐다.
물론 일(취재)이 개입된 종교와의 만남이었고 그러한 만남이 반드시 의도성이 배제된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접촉으로 이어질리야 없겠지만 나름대로 종교를 다시 생각하고 느낄수가 있었다. 종교와의 우연찮은 만남은 종교에 대한 기왕의 긍정일변도의 사고(思考)에 미세하나마 변화와 흔들림을 가져왔다.
무엇보다 변화와 흔들림의 폭은 천주교가 개신교나 불교 등 타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다. 변화와 흔들림의 상대적 크기가 천주교 쪽에 놓인 것은 한편으로는 천주교에 품고 있던 존경과 기대가 그만큼 컸던데 대한 반작용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록 부분적이고 제한된 것이지만 천주교의 특권의식의 분위기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특권의식은 극소수 성직자나 평신도의 언행에서 엿 볼 수 있다. 일부 성직자의 지나친 권위의식과「나 아니면 안된다」는 식의 독선의식 등은 자칫 교만함으로까지 비쳐진다. 여기에 평신도 특히 교회의 기관에 근무하는 일부 종사자들의 이방인을 대하는 뻣뻣함과 퉁명스러움이 드러한 특권의식을 가중시킨다. 그 분위기가 단적으로 표출된 예가 지난해 10월로 서울서 열렸던 세계성체대회서 였다.
감히 특권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이 주관적으로 편견일 수도 있다. 더구나 취재현장에서 부딪친 참으로 작은 부분을 마치 천주교 전체의 모습인냥 왜곡한다는 비난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특권의식에 대한 우려나 자성의 소리가 평신도 일각에서 조차 고개를 들고있는 실정이다.
천주교를 지칭하는 가톨릭의 어원이 보편타당성을 의미할진대 그같은 의미와 배치되는 특별함 내지 우월함의 분위기가 교회에 스며있다는 것은 한번 생각해 볼문제인것 같다.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현상인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주제 넘은 소리를 하는구나라고 느끼고 있다. 무례하다고 생각되더라도 너그럽게 용서해주기를 바란다)
사실 천주교의 특권의식은 천주교가 우리사회에서 수행해온 역할과도 무관하지 않다.
독재정권의 비극을 상징하는 정의실현 민주화 인권의 날말들은 천주교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동의어와 다름 없다. 지난 10년 가까운 군사독재 정권 아래서 천주교와 김수환 추기경이 수행해온 역할을 말과 글로 담아낼 수 없을 만큼 크고 값진 것임에 틀림없다. 누구도 말할수 없는 강요된 침묵의 상황 속에서 추기경의 한마디는 곧 국민의 목소리였고 사제단을 축으로 한 교회의 사회참여는 미주화의 과정에서 중요한 몫을했다.
천주교의 오늘의 위상은 그같은 헌신과 용기와 궤를 같이한다. 그러했기에 천주교가 국민에 미치는 영향력이 교세로 단순 비교되어질 수 없을 만큼 막대하며 종교를 떠나서도 대다수 국민으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쌓아올릴수 있었다.
특권의식이 이러한 국민의 존경과 신뢰가 가져다준 부작용이 아니기를 염원한다.
언젠가 천주교 계통의 월간지에 쓴 평신도의 성직자에 대한 기고가 새삼 떠 오른다. 아마 여성신도로 기억되는데 그 신도는 「로만칼러의 뻣뻣함 만큼이나 신부님의 목에 힘이 들어갔다」는 내용을 기도하고 있었다.
특권의식과 관련지어서 지적하고 싶은 점은 천주교의 언론관이다. 대중매체의 속성이나 매커니즘을 될 수 있으면 외면하려는 자세이다.
과거 참언론의 대명사로 4·19혁명을 이끌어낸 원동력의 하나였던 경향신문을 발행한 경험이있고 오늘에는 평화방송과 평화신문을 운영하는 천주교가 대중매체의 속성이나 매커니즘을 모를리야 없을 것이다. 좋게 말하자면 기존의 대중매체를 이용하지 않는다고, 나쁘게 말하자면 무시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용하지 않거나 무시하거나 그 배경에는 기존 언론에 대한 불신이 깊게 깔려 있다고 느껴진다. 기존 언론이 과거 독재정권 아래서 비판과 감시의 기능을 포기하고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는 불신일 것이다.
천주교가 사회적 영향력과 발언권이 높을수록 책임이 수반되는 것이며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유기적으로 상설된 교회의 대언론창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지난해 서울 세계성체대회 직전 추기경께서 어느 TV와의 대담프로서 하신 말씀은 새삼 천주교의 대언론창구가 재구실을 못하는구나라는 느낌이 들게했다. 몇몇 일간지가 일본특파원 또는 통신 기사로 게재한「북한의 조선천주교도 연맹의 대표단이 성체대회에 참가키로 했다」는 보도에 대한 사실여부를 묻는 질문에『신문기자들이 소설을 썼다』고 웃으면서 답변했다.
물론 추기경께서『소설을 썼다』고 한 담변은 우스개소리로 신문이 추측보도를 했다는 의미로 이해하면서도 안타까웠다. 해회에서 들어온 그 뉴스의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교회의 채널이 없었던점이 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 한 원인이 됐다는점을 이기회를 빌어 밝혀 두고 싶다.
로만칼라를 바라보는 느낌은 성스러움과 순결함이었다. 그러한 믿음이 변치않기를 기원한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