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 당신 자신 안에 머물지 않고 자신 밖으로 이탈하여 자신을 양도함으로써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외부로 활동하신다면 이 행위는 반드시 당신 자신의 내면적 본질과 관련된 것이다. 외부로 향한 하느님의 활동은 내부 안에서의 움직임과 결부되어 전개된다. 하느님이 본질상 자신을 열고 상대방에게 내어주는 사랑 자체이시므로 외부를 향해서도 역시 사랑으로 활동하신다. 그러므로 하느님 자신 안에서의 삼위일체 곧 내재적 삼위일체는 세상을 향한、 인간을 위한 삼위일체 곧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의 바탕이며 후자는 전자의 실현이다. 구원경륜적 삼위일체가 인간의 구원과 관련하여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다면 이 계시를 통하여 내재적 삼위일제가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신비로서의 삼위일체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활동을 즉 창조·구속·성화를 통하여 내재적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 삼위일체는 우리에게 여전히 신비로 남아있다. 『이 세상을 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외아들을 보내주셔서』(요한3、 16)만인을 당신에게로 부르시고 성령안에서 당신과의 친교를 나누게 하신 하느님은 사랑 자체로써만 겨우 표현되실 수 있으시다. 사랑은 언제나 신비이다. 그것은 헤아릴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실재이다. 그러므로 사랑 자체이며 창조되지 아니하고 영원하신 하느님은 신비 자체일 수 밖에 없다. 『하느님은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며 인간이 일찌기 보지도 못했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시다』(1디모6、 16).
사랑은 또한 자신을 드러내지만 여전히 감추어 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결정적으로 계시하시는 순간에 숨어계신다. 계시된 하느님은 감추어 있는 하느님이시다(이사45、 15). 숨김 안에서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나타내신다. 이는 하느님의 본질에서 기인된 것이며 동시에 인간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감추임의 방식으로 인간에게 계시되신다. 『과거의 모든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의 심오한 진리』(골로1、 26)가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히 드러났는데 그리스도는 하느님을 계시하기 위하여 자신의 신성을 인간성 안에 감추셨다. 이 감추임 안에서 하느님이 아버지로 계시되셨으며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로 드러나셨다(마르15、 39). 십자가상 죽음은 성부와 성자의 철저한 감추심이고 동시에 온전한 계시이었다.
이같은 은폐 안에서 계시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가 신앙이다. 따라서 구원경륜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계시하면서 여전히 감추어 계시는 삼위일체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신앙이다. 사실 인간은 단순한 이성적 탐구로써는 삼위일체를 파악할 수 없다. 지상의 인간이 하느님을 직관하여 그 안에 세 위격을 볼 수도 없고 우주와 인간의 존재에서 출발하여 하느님의 생명 안에 세위격이 있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신학자들은 삼위일체의 신비에 접근하는 길이 오로지 침묵과 겸손과 흠숭뿐임을 인정하고 있음에
도 불구하고 신앙에 비추어진 이성을 통하여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시도들이 유비(類比)이다. 우리는 이성이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있는 것과 여러가지 신비 사이의 유사점을 생각함으로써 또한 여러가지 신비의 상호관계와 인간의 종국적 목적과의 연관성을 고찰함으로써 하느님의 신비에 관한 풍성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유비적 해석들은 삼위일체에 관한 서서의 표상들 위에 근거하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하느님은 아버지이시다』『아버지가 아들을 낳으셨다』『영은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에게서 나온다』사랑、 「발출(發出)」따위의 개념으로써 삼위일체의 신비가 성서에 시사되어 있다.
◆성서의 표상들
아버지와 아들: 그리스도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을 때 이는 구약의 야훼를 연상시키며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지만 우리의 감성으로는 감지될 수 없는 분이심을 시사한다.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은 만물의 근원이시며 태어나지 않은 분을 암시한다.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그리스도는 아버지의「외아들」(요한1、 14:3、 16)이다. 외아들의 개념 안에는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났으며 따라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근원이 되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너는 내 아들、 나 오늘 너를 낳았다』(시편2、 7:마르1、 11). 아버지-창조주하느님은 아들의 근원이며 시초이시다. 그런데 아들이「하느님으로부터 난 하느님」으로서 본질상 아버지와 동등할지라도 아버지는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아들을 출생시키셨다. 신성의 근원이신 아버지로부터 나 아들은「빛에서 난 빛」이시다. 「아버지-아들」의 성서적 표상으로부터、 아버지가 태어나지 아니한 근원으로서 아무런 감소나 상실 없이 자신과 본질상 동등한 아들을 낳으셨음이 추론되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뿌리요 나무、 강의 원천과 줄기、 태양과 광선의 관계와 유사하다.
아들은 하느님의 말씀이다:아들은 아버지의 형상(1고린4、 4)으로서「영원한 영광」이신 아버지의 공채이시다(히브1、 3). 그리스도는 영원으로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인 말씀으로서 창조능력을 지니고 창조사업에 적극 협조하였으며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신、 사람들의 빛과 생명이다(요한1、 14). 그리스도는 하느님 안에「내재하는 말씀」으로서 창조와 강생구속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향해 하느님으로 부터「발설된 말씀」이 되셨다.
하느님안에 영원으로부터 내재하는 말씀은 하느님과 똑같은 하느님이시다. 이 말씀이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을 위하여 세상을 향해 발설되시어 창조의 원형으로서 또 구속의 주역으로서 활동하였다.
선물로서의 성령:성서는 설령에 대해「주다」「받다」라는 동사로써 증언한다. 성령은 인간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청하여 하느님으로 부터 받게되는 선물이시다. 성자가 태어남으로써 아들이 되는 것처럼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이 완전한 사랑을 나눔으로써 즉 상호간의 선사호써 나오시기 때문에 그분의 개별 이름은 선사이고 사랑이시다. 아버지는 성령을 통해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내어주신다. 성령의 형존은 항상 사랑의 표현안에 나타난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다』(로마5、 5). 성령은 사랑이기에 아버지와 아들을 묶는 사랑의 끈이다. 아버지는 유일한 사랑인 성령으로 당신 자신과 아들을 사랑하며 아들도 그 사랑으로 당신 자신과 아버지를 사랑하신다.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서 당신 자신들을 사랑으로 인간에게 내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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