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의 굴레와 하느님사랑
창세기에 의하면 하느님은 사랑으로 인류의 원조아담과 이브를 지어내시고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케 하셨다.
또한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어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결단의 삶은 살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이다.그런데 이 자유의지는 욕구하는데로 무엇이던지 할수 있다는 방종적자유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든 사랑고 정의이신 하느님의 명을 따르겠다는 자율적 결단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담과 이브는 마귀의 유혹을 받아 하느님을 자신들의 주재자로 여기지 않고 하느님과 동등한 입장에 서고자하는 망상으로 인해 어두운 죄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이것이 바로 원죄이며、인간이라면 누구나 할것 없이 이 원죄의 굴레를 뒤집어 쓰고 그 중압감을 견뎌내야만 하게 되었다.
실로 죽음과 눈물의 골짜기、은총이 결핍된 세상은 하느님이 고의로 예견한 바의 실현이 아니라 불충한 인간행업의 결과인 것이다.자력으로 무엇이던 해볼수 있다는 인간의 교민은 비구원이란 암울한 상황을 낳고 말았다.
그러나 이로써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영원히 단절된 것은 아니다.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철저한 사랑은 독생성자 예수그리스도를 구원의 속죄양으로 내려 보내심으로써 명백히 계시되어진 것이다.
육화하신 그리스도
원조가 동산에서 쫓겨갈때 하느님은 이미 한분의 구세주를 보내시어 전인류를 구원할 것을 미리 계획하셨고、세기가 바뀌어도 이 계획을 변경시키거나 폐지시킨 일이 없어셨다.
마침내 예정하신 그 날이 왔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독생성자는 신성과 인성의 완전한 일치로 역사안에 개입하신 것이다.그분은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인간적고통과 죽음을 당하셨고、속죄양으로서 인간의 죄과를 울러 메셨다.또한 신성으로써 이 모든 것을 헛되게 하시지 않으시고、죽음을 쳐이기시고 구원의 중재자가 되심으로써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통교의 장을 마련하신 것이다.
육화의 신비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과 인간이 하는 일이 판이함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주재하시는 하느님이 굳이 당신의 권능을 감추시고 무능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심은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다.
더구나 지리적ㆍ문화적 상황이 열악 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로마의 식민지로 허덕이는 이스라엘을 모국으로 하고 보잘것 없는 이스라엘 처녀、마리아를 성모로 삼으심은 비상식적이고 역설적인 하느님의 행업이다.이것이 바로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하는 하느님의 독특한 방법이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집없는 난민의 아이처럼 태어난 이 엄청난 사실 앞에 누가 하느님을 높은 곳에 앉아 계신 냉혹하고 무정한 분이라 말할수 있겠는가?또 누가 하느님은 인류 대대손손의 비참한 삶을 완전히 모르고 체험도 해 보지 않았다고 말할수 있겠는가?
무죄한이、세례 받다
「그 분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자격조차 없다」(루가3、16)하고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는 요한의 말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러면 예수도 보통사람과 같이 죄가 있다는 말인가?아니면 왜 무죄한 이가 굳이 세례를 받았는가?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세례 받는 모범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그분은 성자로서 본질적으로 순결하시고 무죄하신 분이시다.실로 예수가 보여주신 세례의 표양은 전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하느님 면전에서 참회를 표시하는 것이다.즉 이것은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구원의 속죄양이 되라는 하느님의 사명을 순명으로 달게 받겠다는 표지인 것이다.
12제자와 바리사이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복음전파와 교회설립을 위해 12제자를 불러 모으셨다.이들의 신분은 주로 무식힌 빈민층이 었으며 소외된 계층었다.그러나 이들은 예수의제자가 될 수있는 영광을 안았고 예수의 충실한협조자로서 생명을 다하였다.
이와반대로 당시 유대사회의 중견인물들로서 경전과 사제젝을 장악한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은 예수를 눈의 가시처럼 여기며 배척했다.이들은 많은 세월속에 편안한 생활과 사회적 특권을 누렸으며 교만하고 위선적 태도로 변질되어 남들을 못살게 들볶았다.
이에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주의적 타성을 질책하고 하느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는 철저한 이웃사랑과 희생의 실천이동반되어야 한다고 경고하였다.
더구나 안식일에 대한 파격적 해석、창녀들과 세리들과의 친교、성전정화등은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권위를 위협하였고 율법주의적 사회구조의 존립을 전도시킬 자극으로 간주되었다.결과적으로 이들에 대한 예수의 강경한 대응과 이에 맞선 바리사이인들의 음모는 예수의 속죄양적죽음을 예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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