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안에는 성자와 성령의 발출 즉 두 가지 생명 발출이 있다.
이 발출이 신적 생명 안에 운동을 일으키며 관계들을 형성한다.
충만한 생명의 발출들에서 형성되는 관계들과 움직임들은 삼위일체가 사랑의 사귐이 되게한다. 운동을 바탕으로 한 관계들은 사랑의 교류일 수 밖에 없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신성의 유일한 근원으로서 영원히 신적 본질을 지니고 성자를 낳았다. 성자는 성부와 구별된 분이며 성부는 영원히 성자를 사랑하고 또한 성자도 성부를 사랑한다. 성령은 성부와 똑같은 신적 본질을 전적으로 영원히 선사 받은 성자를 통하여 발출된다. 성령은 세 위격을 한데 묶는 끈으로서 성부와 성자의 상호 사랑이고 공통 사랑이다. 사랑인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사랑 자체이심이(1요한4、7~9) 명백히 이해된다. 진실한 사랑은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적절한 유비가 될 수 있다.
사랑의 통교
참 사랑은 다른 이를 향해 열려 있고 그에게도 가서 관계를 맺는 것이어야 한다. 모든 것의 근원이고 온전히 선하신 하느님 안에는 최고의 선과 사랑이 있다. 사랑보다 더 완전하고 선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느님이 홀로 계신다면 자기에 대한 사랑 즉 자애 (自愛)만 있을 뿐이므로 참사랑은 타자를 향해 있어야 한다.
완전한 하느님 안에 영원하고 진실된 사랑이 있기 위해서는 아버지 하느님 이외에 아버지와 본질상 동등한 하느님이 계셔야 한다. 성자가 하느님 안에 있으므로 하느님 안에 타자를 향한 사랑 즉 참사랑이 존재한다. 그런데 둘 사이만의 사랑에 그치고 제삼자를 향해 개방되어 있지 않는 사랑은 결핍되고 약한 사랑이다. 부부사랑이 견실하고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제삼자 즉 자녀가 부부애에 참여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는 성부와 성자의 사랑이 완전하고 충만한 것이 되려면 그 상호 사랑에 동참하는 제삼의 위격이 있어야 한다. 공통된 사랑은 둘이 하나가 되어 제삼자를 함께 사랑하는 데에서 생겨난다. 즉 둘 사이의 사랑은 제삼자에 대한 사랑의 불꽃 속에 하나로 용해되는 데에 존재한다. 둘 사이에 참 사랑이 있어서 둘 다 참사랑을 갖고 있을 때에 비로서 거기에 공통 사랑이 존재한다. 성부와 성자가 완전한 사랑을 나누어 두 분 모두 참 사랑을 가지기 때문에 공통 사랑이 생겨난다. 성부와 성자가 완전한 사랑을 나눔으로써 생겨난 공통 사랑이 곧 성령이다.
「나」「너」「우리」
「나」「너」라는 말로 표현되는 상호관계 및「우리」라는 말로 표현되는 일치는 인간의 근본적 존재양식이다. 인간 인격은 이 존재양식을 통하여 자기를 성숙시키고 완성한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인격은 삼위일체를 약간 닮았으므로 하느님에게 있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관계 속에 있는 위격인 것처럼 인격도 남에게 향하여 열고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과 남을 성숙시키는 것이다:『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창세126).「나」-인간은 스스로 있는 자、유일무이한 자、모든 다른 이와 구별되는 자이다.「나」는 타자에게로 자신을 열고 타자에게 가서 「너」라고 말한다.「나」와「너」의 상호 만남 중에「나」는「너」를 역시 둘도 없는 귀중한 존재로 인정한다.「나」가「너」를 만날 때에 자기 고집에서 벗어나 대화와 일치의 관계를 맺는다.「나」와「너」의 관계는 인격관계이다. 여기서「우리」라는 일치가 이루어진다 이 일치는 두 사람의 구별을 말살하지 않고 성숙시키고 완성한다「나」와「너」는「우리」안에서 인격적으로 성장한다.
이 유비를 삼위일체에 적용시간다면 성부는「나」、성자는「너」、성령은「우리」가 생각 될 수 있다.「나」는 제1인칭이고 이에 앞서 다른 인칭이 없는 것과 같이 낳음 받지 않으신 성부도 첫째 분이다.
「나」는 주체로서「너」와 관계 맺고 있는 것처럼 성부도 성자를 향해 있는 자존재이다.「너」는 제2인칭으로서「나」와 상대 하는자、인것과 같이 성자도 제2위격이고 성부의 사랑에 응답하는 자존재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우리』로 생각 될 수 있다.「우리」가 「나」와「너」가 함께 행하는 공통 활동의 근원인 것처럼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발출시키는 유일한 근원이다. 성부와 성자는 「우리」로서 성령을 향해 있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우리」가 가능한 것은 성령 덕분이다. 성령은 삼위일체에 있어서「우리」에 해당된다.
「하나」와 「다수」
한 분 하느님 안에 세 위격이 있으므로 하느님은 고독한 신이 아니다. 하느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귐이다.「나」와「너」가 구별되고「우리」안에서 일치를 이루므로 삼위일체의 신비는 무수한 만물의 기원과 목표에 대한 답을 제공해준다. 사랑은 다수의 다양성을 무시하기는커녕 인정하고 완성시키는 일치의 원리이다. 다양한 다수를 인정하지 않는 하나는 다수를 억압하고 독점하며 지배하려 함으로써 대립과 분열을 조장할 뿐이다. 적대적 단일성은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한다. 절대적인 것이 단순히 다수일 경우에도 역시 혼돈을 가져온다. 세상에서 생겨나는 일치는 그저 우연히 이루어진 하찮은 현상에 불과하고 결국에는 모든 것이 본래의 소용돌이로 되돌아가고 말 것이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은 일치이다. 다양성이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고 하나의 도달점에 귀착된 것 이 근원에 대한 인류의 고통 된 신념이다. 완성과 구원은 만물이 다양성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며 하나에로 복귀되는 것이다. 만물은 한 분 하느님이라는 근원에서 나왔고 또 각기 고유한 본성에 따라 복잡화의 과정을 거쳐 성장하다가 다양성을 지닌 채 한 목표에 총괄되고 완성된다. 하느님은『하나의 것이 되기 위하여 즉 일치되기 위하여 많아져라』하고 창조사업을 펼치셨다. 그리스도는 분산되어 있는 모든 것을 하나로 모으시기 위하여 구속사업을 성취하셨다:『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요한12、32) 성령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은사를 선사하여 여러 가지 방식으로 봉사하게 하는 일치의 영이시다(1고린12、1~12).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될 때에 하느님은『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신다』(1고린15、28):『아버지、이 사람들이 모두「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게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주십시오』(요한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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