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 : 한권의 감명깊은 시집을 우연히 읽게 되었을 때의 기쁨을 그 무엇에 비길수 있을까?
척박한 정신세계를 두 손으로 번쩍들어 올려, 시간속에 영원을, 평범한 일상속에 신비를, 공간속에 무한의 어느 끝을 열어 보이는, 앞서간 이의 그 높고 깊은 영적 세계와의 만남은 우리들에게 더없이 큰 기쁨이요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얼마전 나는 우연히 인도의 농부시인 「까비르의 시집」을 읽었다. 타고르의 시세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던 그의 시 한수를 여기 소개한다.
『밤이 물밀려 온다/호수 위로/꽃잎처럼 시간이 덧없이 지고 있다/「사랑하는 이」와 헤어져/빛 속에서나 어둠 속에서나 나는 머리가 뜨겁다/이 덧없음을 누구에게 말 할 수 있을까?/나 「까비르」는 말한다/내말을 들으라, 떠도는 나그네여/사랑하는 이를 만나는 일 말고는/다른 민족이 있을 수 없다』
일찌기 아오스딩 성인이 그의 고백록에서 『주여 당신품속에 내영혼이 영원히 쉬는 날까지 내 영혼의 괴로움은 끝이 없나이다』라고 했듯이 초월자와의 합일을 추구했던 평범한 농부 「까비르」의 이 구도자로서의 고백은 내 무딘 감성의 수면에 난데없이 쏟아붓는 한줄기 백우(白雨)와도 같은 것이다.
▨ 둘 : 시인 「까비르」가 본 호수는 어둠에 묻힌 호수이다. 그리고 이 호수는 바로 죽은 듯이 웅크린 대지 위에 꽝꽝 얼어 붙었던 한(恨)의 호수요, 연두 빛 바람에 일렁이는 생명의 호수요, 무서운 광풍이 휘몰아 치는 죽음의 호수다. 그리고 높고 깊은 가을 하늘을 가슴에 떠올려 놓고 차디 찬 기다림으로 침묵하는 호수가 아닌가. 이러한 한과 생명과 죽음, 기다림의 호수 위에 내리는 어둠, 그것은 바로 아직도 어둠의 세력에 잡혀 있는 삶의 본 모습이 아닐까. 그리고 이 호수는 「요나」가 던져졌던 죽음의 바다요, 효녀 심청이가 몸을 던졌던 임당수요, 우리 모두가 건너 가야할 이 세상, 삶의 바다가 아니겠는가.
▨ 셋 : 마르꼬 복음사가도 이러한 호수에 얽힌 이야기를 보고하고 있다. 『어느날 저녁 때가 되자 예수와 그 제자들이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갔다. 그리고 어둠이 짙어가는 호수에 난데없이 거센 회오리 바람이 불어 배는 물이 가득 찼고 침몰 직전에 있었다. 겁에 질린 제자들이 예수를 찾아 보니 그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은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이 안 됩니까?」하고 불평하자 예수가 「잠잠해져라!」하고 명하자 바람은 멎고 조용해 졌다. 그리고 예수는 「여러분은 왜 겁냅니까? 아직도 믿음을 갖지 못합니까?」하고 말씀하셨다』(마르꼬 4, 35~41참조)
어둠에 묻힌 호수(바다)를 건너 가는 예수와 그 제자들은 폭풍우를 만났다. 그리고 배에「물이 가득찼다」는 표현으로써 우리는 이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절박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토록 긴박한 상황속에서도 「예수는 주무시고 계셨다」고 마르꼬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보고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똑 같은 체험을 한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 날 수 없는 역경과 빠져나 갈수 없는 곤경에 처하여 우리는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지만 하느님은 주무시고 계신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침묵을 체험하게 된다. 그가 처한 상황이 절박하고 극한적일수록 더 깊은 「하느님의 침묵」을 인간은 체험하게 된다. (인간의 극한 상황을 체험 해 보지 못한 필자로서는 참으로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주무시는 하느님」은 「하느님의 부재」나 「신은 죽었다」라는 태도와는 전혀 다른 태도이다.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힌 인간」에게 「잠들거나 졸으시는 하느님」이 체험될 수 없다.
그러기에 「자기자신으로부터 사로잡힘」에서 벗어나 하느님께로 그 삶의 방향을 돌리는 믿음의 결정적인 순간부터 체험되는 하느님의 침묵은 하느님의 능력과 그 역사(役事) 하심이 우리의 삶 한 가운데 아직 확연히 드러나지 않음에 기인한다. 그러나 주무시던 예수가 깨어나 폭풍을 향하여 조용히 건네시는 그의 한마디 『잠잠 하여라』라는 말씀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 졌듯이 하느님의 능력은 이 세상에서 우리 눈에는 참으로 놀라운 결과로 어느순간 나타난다. 『예언자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렸던 그리스도, 그가 하는 일이 있다면 다만 조용히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마지막엔 빈혈증에 걸린 90세 된 종교 재판장의 입술에 키스하는 장면 뿐이다』라고 「발트니그」는 묘사했다.
예수의 부활도 한 낮에 북과 꽹과리 소리로 이루어지지 않고 첫 새벽 여명의 은밀한 순간에 이루어졌다. 하느님의 능력과 그의 역사하심은 우리 눈에 확인 되기도 전에 「이미 이루어진 사실」로 우리에게 전달된다. 하느님의 능력은 무력이나 권력으로, 지배함으로써 접근하지 않고 온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신비로이 이루어진다.
▨ 다섯 : 「하느님께로 돌아선다」는 것을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를 흔들어 깨운다」고 표현할수 있을 것이다. 「그를 흔들어 깨우는 것」은 바로 믿음의 행위이다. 그분께 우리의 생명과 구원, 해방이 있음을 고백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 고백은 하느님 앞에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지려는 노력과 의지로 나타날 것이다. 「사랑이란 서로 책임을 지는 것」이라 할 때 오늘 우리시대의 모든 혼란과 위기는 서로 책임을 이웃에 전가하는데서 비롯한 것이라 본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세상이라는 바다위에 「정부」라는 돛을 달고, 「국가」라는 배를 타고 갈 때 「국민」은 바람과 같은 것이다』라고 한 뵈르네의 말을 비춰볼 때 우리의 돛은 낡고 찢어져서 구멍이 나 있고, 바람은 돌개바람 같은 광풍으로 종잡을 수 없어 우리의 배는 지금 물이 목에 까지 가득차 있고 끝없는 격랑 속을 표류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그분께로 돌아 서서 그를 흔들어 깨우지 않으면 우리의 배는 침몰 할수도 있다. 호수를 건너가는 예수와 그 제자들과 같이 우리 자신의 구원과 이 민족과 세계의 구원이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오늘 이시대 우리의 공동체가 그분께 돌아선다면 그 순간 이미 그분은 우리 앞에 와 계시고 바람은 멎고 고요해 질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사로 잡힘」에서 벗어나 그분께로 돌아선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형제적 책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두가지 서로 다른 계명이 아니라 하나의 계명으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가 우리에게 주신「구원의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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