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훈(가명)이라는 남학생을 처음 만난것은 그 무렵의 일이었어요. 그는 같은 마을에 사는 대학생이었는데 어렸을적부터 아저씨댁 문구사 단골손님이었대요. 그는 성격이 쾌활하며 활달해서 문구사에 올적마다 내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오고 또 동네꼬마들과도 잘 어울렸어요. 그가 꼬마들과 장난을 하면서 호탕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 이상스럽게 내 마음도 훈훈해지곤 했거든요.
우린 아주 쉽게 가까워졌습니다. 그는 매일 문구사를 찾아왔고 나는 그와 함께있는 시간이 참 좋았어요. 어린이같은 해 맑은 웃음, 항상 넘쳐 흐르는 유모어 난 오랫만에 처음 순수한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고 있었어요. 미움도 분노도 없이 좋은 감정 하나로만 사람을 만날수 있었음에 난 참 저윽이 놀랐어요.
우린 가끔 마을 뒷산에 올라가 여러가지 이야기도 하고 가까운 바닷가를 걷기도 했습니다. 그의 퍽 진지하고 신중한 모습이 왠지 나를 온통 사로 잡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점점 좋아질수록 내마음 한구석은 그늘져 가고 있었어요.
모두 잊어버리고 다묻어 버리고 떠올리지 않으려면 지난날의 기억들이 다시 바늘처럼 살아나 곧곧하게 일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만나고 돌아온 밤이면 잠이 오질 않았어요. 그토록 깨끗하고 다정한 그를 내가 꼭 다치게 할것만 같았기 때문이었죠. 지난날 엄마에게 주었던 고통을 또 그에게 주게 될것만 같아서 그를 떠나야겠다는 생각도 몇번이나 해보았지만 결코 그럴수는 없었습니다. 다음날 그의 얼굴미소와 다정한 눈빛을 대하면 도저히 헤어질수 없다는 생각이 확신으로 다가오곤 했어요.
그렇게 그늘과 태양을 한 가슴에 안고 지내던 어느날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경화야,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만큼의 고통은 지니고 살아가는 모양이다. 그 고통이라는 것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것 같아도 자기 자신에게만은 엄청난 크기일 수가 있지.
경화한테서 언뜻 언뜻 보여지는 어두움은 그런 고통 때문이까, 하지난 중요한건 그 고통을 피하지 않는 자세라고 생각해. 누가 말했던가 고통은 아홉번째 축복이라고… 어느 순간에 자신을 잃거나 미워하지 않고 할수 있는데까지 부딛혀 나가는것, 그게 우리들에게 제일 소중한것 아니겠어.
경화야, 난 함께 닥쳐올 모든 고통이나 행복을 함께 하고싶다. 서로를 의지하면서 끝까지 함께 있고 싶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응 경화야. 나는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울어야 했습니다. 내 가슴은 슬픔과 기쁨이 온통 뒤범벅이 되어 터질것만 같았습니다. 그날 밤도 나는 뜬 눈으로 지새었습니다.
지나간 날들, 그리고 사랑하는 그의 모습, 앞으로의 날들이 하나하나 영화의 한장면처럼 앞을 스쳐 갔고 그 속에서 나는 많이 울고 또 많이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는것이 그를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것일까.
정말 모든것을 백지로 돌리고만 싶었던 그 밤이 새고 새날이 밝을무렵, 나는 새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 모든것을 고백하자, 그래도 그가 나를 받아 준다면 그의 곁에서 일생을 속죄하며 살아가자. 다시 한번 주어진 생명으로 그만을 사랑하며 모든 어려움을 달게받자』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참 평온한 마음이었습니다. 이젠 무슨 일이 있어도 더 이상 놀라거나 슬퍼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아침에 만난 그는 나의 밝은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며 즐거운 웃음을 보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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