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윤리의 핵심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바울로 사도의 표현대로『오래 참습니다. 친절합니다. 무례하지 않습니다.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모든것을 덮어주고 모든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Ⅰ 고린 13, 1~8) 이러한 사람이 어느때보다 필요한 시대가 현대이며 이러한 사랑이 바로 관용의 덕이다.
옛 사람들의 말대로 인간은 십인십색이다. 이런데서 공존을 위하여는 관용의 덕이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관용의 덕은 동양사상으로는 관용외에도 인이나 서(恕)의 개념으로 대치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관용을 실천하는데 어려운 점은 바로 진실성과 성실성을 지키는 데서 생긴다. 인간이 자기의 진실과 확신을 지키고 그에 성실하면서 악이나 불의를 묵과할수 있는지 묻게된다. 만일 진리가 아닌것을 알면서 묵과한다면 그것은 악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존을 위해서 타협이 조건이라면『누구든지 나와 한가지로 아니하는 자는 나를 거스르는 자이다』(마태 12, 30)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며 순교의 태도는 무엇이라고 설명되는가? 이러한 복잡하고도 현실성을 가진 것이 이 관용의 윤리 문제이다.
서구 사회에서 처음으로 관용이 사회적 문제로 심각하게 요구된 것은 근대화와 함께 제기된 종파간의 평화 공존과 인문주의의 발달에서부터 생긴 인권과 자유사상과 학문의 자율 때문이었다. 관용이 인간사회에 요청되게 된것은 변화된 사회구조 안에서 서로 다른 종교와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함이 없이 어떻게 자기의 권리를 보존하며 평화롭게 공존 할수 있을까의 길을 모색하고 찾아낸 해결책이었다. 처음에는 한 사회 안에서 자유와 인권을 보호할 방법으로 서로 참아주고 견디어내자는 소극적 의미가 많았다. 따라서 타인의 악이나 오류를 묵인한다는 표현이 될수도 있었다.
이와같은 소극적 의미로서의 관용은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개인주의나 이기주의를 조장하는 결과도 없지 않았다. 수동적이며 소극적 태도의 관용의 적극적 의미보다는 사회생활을 위한 공존의 방편으로 요청하였다.
어떤 사람이「관대하다」할 때는 단순히 참아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다른 사람을「어떻게」대하고 있는지 전체적인 태도, 남을 받아들이는 행동의 성격을 평가하는 말이다. 타인의 잘못이나 악행을 자신의 선과 초연함으로 악이나 오류에 직접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도 그를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주는데서 그 품위를 알수 있다.
그러므로 관용이란 단순히 남을 참아주는 것도, 악과의 타협도 아닌 사진은 견고하면서도 타인의 권리와 양심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약점과 부족을 참아주는 성숙한 태도이다. 즉 한 인간의 잘못이나 부족을 알면서도 그의 인격과 인간적 존엄성을 손상시키거나 과소평가하지 않는 진실한 태도인 것이다. 이 기본사상이 2차 바티깐 공의회의「종교자유에 관한 선언」과「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을 통해서 잘 드러났다.
진정한 관용은 폭력을 사용치 않고 자기의 확신을 분명히 그러나 차분히 표현하고 발표할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 자기의 의사를 남에게 강요함이 없이 자기의바른 점을 타인에게 인식시키려 한다.
관용의 윤리적 가치는 자기의 태도를 분명히 하면서도 틀릴 수 있고 부족함이 있을 수 있는 인간의 현실을 수긍하는 겸손한 태도이며 자기와 다른 의견에 접근할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되므로 타인의 인식과 가치세계에 참여할수 있는 사랑의 태도이다. 사랑과 겸손으로 자기의 유한성을 인정하는 태도이며 인간품위의 동등성을 받아들이는 행동이고 타인에게 회개의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이런 덕행을 가진 자는 현세에서도 진정한 자유인이며 현실을 가장 잘 극복하는 자이다 (로마12, 9~21 13, 8~10).
교회내에 있어서의 관용의 실천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이고 현대가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사회 덕목중의 하나가 관용이라면 신자들 각 개인이나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과 영향력이 큰 사람에게 요구되는 덕이라고 볼 수 있다.
관용의 실천에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지키게 된다. 첫째 신앙교리와 계시진리에 대하여는 관용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기본 신앙이나 교리에 직접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면 자유롭게 충분히 토론할수 있도록 배려하고 연구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관용이 없다면 생명력도 진정한 인류발전도 기대하기 어렵다. 과거의 종교재판이라든지 금서목록등의 방법은 그 시대에 일정한 기능을 발휘했을지 모르나 이제는 변화되어야할 방법들이다. 둘째 개인적이거나 시민생활에 있어서는 무지와 오류에 빠져 자기 확신만을 따르는 이웃에 대하여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이는 이웃사랑이 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인의 확실한 양심에 대하여는 존경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국가도 양심의자유를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정치사회에 있어서의 종교와 양심의 자유
관용을 거스리는 행위는 독선이나 자만, 아집이나 이웃에 대한 무관심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는 모든 윤리도덕의 완성인 사랑에 위배되는 행위이다.
한 국가가 관용을 베푼다는 것은 인간사회 안에서의 공동생활의 기초를 놓는것이고 각 개인에게 능동적이고 자율적 참여를 가능케 하는 것이며 개인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과 기본권은 자연권으로서 국가 이전의 것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특성과 차이점때문에 완전한 중립이 어려울수 있으며 공공의 이익과 타인의 권리옹호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한 개인의 자유는 어느정도 제약을 받을 수 있다. 즉 미풍양속이나 타인의 권리가 침해되는 경우 사회정의와 질서의 차원에서 평화공존을 위하여 개인의 이기심이나 독선은 제한을 받는다. 즉 개인적 혈수라든지 사형이나 인권을 유린하는 폭력이나 인신매매 같은 반사회적이고 비인간적 행위들은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개인이나 교회나 국가가『필요한 일에 있어서 일치하고 불확실한 일에 있어서 자유를 존중하며 모든 일에 있어서 사랑을 보존하면』(사목헌장92) 관용의 덕이 실현되는 인간사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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