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캐테 콜비츠(1867-1954)는 금세기 독일이 낳은 가장 위대한 여류화가 중에 하나이다. 그녀는 보불전쟁이 끝난 시대에 태어나, 세계 양차 대전이라는 가장 암울한 시대에 걸쳐 살다 이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작품세계를 놓고 요즘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그녀는 「민중화가」라고 할수 있다. 그녀의 그림 주제는 한 마디로「곤욕 당하고 학대받는 민중」에 관한 것이다.빈곤과 추방, 병고와 착취, 전쟁 등 집단적 폭력과 증오에 대한 한 인간의 무력함을 생생한 삶의 현장을 통하여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그림(대부분 판화)은 요즘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민중화와는 달리 사회고발이나 선동, 선전에 머무르지 않고 더 높은 인간정신의 영원성을 예술로 승화 시키고 있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 일으켜, 새로운 인간공동체에 대한 강한 꿈을 갖게 하는것이 그녀의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수 있다.
▩둘: 그녀의 작품 가운데 대표작이라 할수 있는 「사태의 긴급성」「죽음」 등 일련의 작품을 보면 죽어가는 어린아이 곁에 오열하는 사람이 있고 그뒷편 어두운 구석에는 실의에 잠긴 채 망연한 모습으로 서 있는 다른 한사람이 등장하고 있다.
꺼져가는 어린생명과 속수무택을 이를 지켜 보는 인간, 이 긴장된 인간의 한계성을 통해 그녀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 그림을 볼때마다 인간이란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도움을 줄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확인한다. 「죽음」으로 표현되는 이 세상의 악의 세력, 그 분수령에서 오직 하느님만이 구원과 생명으로 우리를 이끄실수 있는분임을 신ㆍ구약 성서는 끝없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셋: 야이로의 딸을 되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낫게하신 예수의 기적사화(마르5, 21~43)는 바로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단 하나 밖에 없는 외동딸의 죽음(루가8, 42)은 야이로에게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절박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더 손을 써 볼수 없는 죽음앞에서 만나는 인간의 한계상황을 말해 준다. 동시에「하혈하는 부인」의 경우도 인간으로서 온갖 방도를 다 취해 본 절박한 상황임을 성서는 말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처지에 두사람의 모습은 우리들의 삶, 그 한가운데 헤어날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속에서 우리의 참된 구원은 어디로부터 어떻게 오는지르 마르꼬복음사가는 말하고자 한다.
즉 우리의 구원은 바로「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이 바로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드러내고 있다.
「야훼 홀로 우리의 구원이시다」라는 시편 작가의 고백이 우리의 믿음이 될때 우리는 비로소 폭력을 폭력으로 대처하지 않을 것이고, 선을 위한 폭력을 정당화시키지도 않을 것이다.
▩넷: 폭력적인 공안정치의 희생이고 강경대군으로부터 줄을 잇는 일련의 불행한 젊은이들의 죽음을 그 어느 때 보다도 우리의 가슴을 무겁게 하고 있다.
타인의 죽음 앞에 경외심을 갖기 보다는 너무나 쉽게 책임없는 발언으로 우리의 당혹함은 더 가중되었고, 확인되지도 않은 「유서대필사건」을 제도언론에 유포하여 그 죽음이 갖는 본래 의미보다는 엉뚱한 곳에 우리 모두의 시선이 쏠리고 있음은 이 시대의 불신과 의혹의 벽을 더욱 두텁게 하고 있다.
이 불행한 죽음에 대한 책임을 그 아무도 지지않으려 한다는 것은 이번에 실시된「광역선거」과정에서 그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들의 죽음에 대한 산 사람들의 책임은「회개」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할때 이회개하는 마음은 바로 예수앞에 무릎을 꿇으며 사랑하는 딸의 생명을 구하고, 평생의 소원이었던 자기생명의 구원을 위해 타인의 질타를 무릅쓰고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던 그 여인의 믿음과 같이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회망이「예수」, 그분께 달려있음을 고백하는데 있다고 본다.
▩다섯: 그러나 「하느님의 구원과 그 도우심」이란 것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뒷짐을 지고 관망하는 것이 아님을 바로 이두 사람의 태도에서 우리는 볼수 있다.
예수야 말로「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전폭적인 신뢰, 즉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믿음을 이 기적은 이루어 졌다. 불결함의 상징으로 그 당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철저히 소외되었던 하혈하는 부인의 경우도 그렇고, 유대교회당장을 유람하는 랍비에 무릎을 꿇었던「야이로」의 태도에서 우리는 이들의 믿음이 어떤지를 엿볼수 있다.
이러한 믿음은 다른측면에서 본다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깊은 연대성」에서 출발한다. 불행한 사태를 남의 일로만 보는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일로 보는 사랑의 결단이 바로 믿음의 행위라 할수 있다. 이 결단은 단순한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다.
예수를 찾아가 무릎을 꿇은 「야이로」처럼 군중의 무서운 시기와 질책을 아랑곳하지않고 예수의 옷깃을 몰래만졌던 그부인과 같이 우리도 한공동체의 집단적 한(恨)을 내삶의 현장에서 책임지려는것이 속죄의 행위요 이러한 행위가 바로 오늘 우리의 믿음이 될때 우리의 구원은 역사속에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죽은 야이로의 딸을 향하여 『탈리타 쿰』 (어린소녀야! 너에게 이르노니 일어나거라!) 하신 예수의 그말씀이 우리 가운데서도 일어 날것이다.
오늘 우리시대의 「한 맺힌 젊은 죽음」앞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 엎드릴때 그들이 죽음으로써 진실을 말하고자 했던 그말이 「주님의 말씀」으로 되살아나 우리의 역사를 생명과 구원으로 이끌어가게 될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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