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4월1일、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태어난 「가톨릭신문」이 오늘로 63주년을 맞았다. 한국교회와 더불어 자라온 지난63년간 가톨릭 신문은 과연 이 세상과 교회에 무엇을 주었는가. 또 무엇이 되었는가. 63살이라는 경륜과 경험을 바탕으로 가톨릭신문은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열기위한 또 다른 도약대 위에 서고자 한다. 이에 본보는 가톨릭신문이 보다 유익하고 보다 알찬 교회 정론지로 새롭게 무장하기위해 애독자들로부터 사랑어린 충고를 듣고자 한다. 아울러 전국 애독자 가운데 가톨릭신문을 특별히 아끼는 두분을 초대 가톨릭신문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기대를 들어본다. 본보 최다 독자글 투고자인 원주교구 김용순씨와 본사 수원분실에서 신문발송 봉사를 지속해은 조원행 할아버지가 바그 그들이다.<편집자註>
『매주 목요일 새벽이면 어느날 보다 들뜬 기분으로 기도에 임하지요. 이날은 가톨릭신문 발송에 한몫하는 날이거든요』. 자그만 체구에 40대 같은 앳된 홍안의 모습에서 81세라는 고령의 할아버지 티는 찾아볼 수 없는 조원행(요셉 북수동본당)옹. 그에게 목요일이 없다면 인생이 무의미할 정도로 소시적 소풍날보다 더 기다려지는 하루다. 그것은 마지막 정열을 쏟았던 「가톨릭신문」을 접고 주고 띠지를 끼우는 일에 연하의 봉사자들보다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노익장과 능수능란한 솜씨를 뽐낼(?) 수 있는 날이기 때문.
지난 75년 프란치스꼬 재속회에 가입、수원「형제회」회장직을 맡은 바 있는 조옹은 항상 새벽4시30분에 기상、간단한 새벽기도를 봉헌한후 냉수마찰로 심신을 단련한다. 『냉수마찰 덕에 아직 감기 한번 앓지 않았다』는 그는 수도자 정신 구현으로 성무일도(성직자용) 기도를 1시간동안 봉헌하고 새벽 미사에 참여한다. 이렇게 시작되는 일과지만 『어떤 봉사보다도 마음에 부담이 없고 다른 봉사회원들과 허심탄희하게 웃고 즐길 수 있다는 만남의 날로 이날만큼은 노인의 고독에서도 벗어날 수 있어 몹시 기다려진다』고 조옹은 목요일 오전 9시시면 악천후도 아랑곳 없이 30분씩 걸어서 가톨릭신문사 수원 분실에 출근(?)한다. 그가 가톨릭신문과 인연을 맺은 것은 15년전부터다.
1911년 1월28일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월곡리에서 출생한 조옹은 약관 20세에 면서기로 출발、정년퇴직 때까지 30년을 공무원으로 일했다. 한학자 집안의 엄한 교육과 제사문제로 천주교에 접근하지 못하던 그는 장성한 외아들 조성헌(베드로·현 안성군주)씨의 권유로 자진 안성본당을 방문、보좌신부로부터 3시간에 걸친 단독 교리를 수강하고 그해 (1961년) 8월14일 50세로 영세、입교했다. 그의 열성과 헌신적 교회봉사에 탄복한 안성본당신부는 67년 1월6천여명의 본당 살림을 전적으로 맡기면서 사무장에 임명했다. 그는 2년안에 본당의 부채 30만원을 모두 청산하고 71년 안성 대천동성당을 설립、분가시키는데 산파역할을 했다. 조옹이 아들 따라 73년 수원에 정착하면서 제일 먼저 느낀 것이 수원 시내에 개신교 서점은 3개소나 있는데 신자수가 많은 가톨릭 서점은 한곳도 없다는 사실에 놀라 이때부터 남은 여생을 교회 출판물 보급사업에 헌신코자 결심하고 안성본당을 떠날 때 신자들이 모아준 금반지 5돈값 2만원과 자녀들이 용돈으로 준 3만원등 5만원을 움켜쥐고 교구청신부의 추천서를 받아 76년 3월 명동에 있는 가톨릭출판사 업무부장을 찾은 것이 가톨릭출판물 보급활동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됐다.
『재직 10년에 교회서적 자진 봉사자는 처음 본다』는 업무부장은『얼마든지 외상으로 가져 가시지요』하며 수락했으나 천성이 외상을 싫어하는 그는 현찰로 서적 60권을 사서 지고 왔다. 『열심히 보급에 임했으나 신자들의 냉대는 극에 달했다』고 술회하는 조옹은 77년1월 고등동 황익성 신부(현 광명주임)의 주선으로「경향잡지」30부、「가톨릭시보」30부、「소년」15부를 인수하고 시내는 물론 용인 이천 안성지역 등을 매주 순회방문、심혈을 기울인 결과 그해 연말에는 6배 이상 증가、「가톨릭시보」가 3백10부、서적도 2만부를 넘어섰다.
『전교없는 보급은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조옹은 가장 손쉽게 읽을 수 있는 가톨릭신문에 더욱 애착을 갖고 꾸르실료와 레지오 등을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을 일일이 방문하고 우편으로 송달했다. 지금도 구겨진 신문을 모아 벽지 공소회장들과 교도소에 사비로 보내주고 있는 그는『서울 출판사에서 메고와(당시 수원지사 없었음) 시내는 직접 배달하면서 개에게 물리며 장사꾼 취급을 당한 때가 제일 서글펐다』고 회고한다. 그는 80년 고희 생신을 끝으로 체력에 밀려 일체의 출판물 보급을 교구에 인계하고 81년2월 직장인을 위한 통신 교리부를 설치、운영해 오면서도 신문 발송날은 만사를 제치고 봉사해오고 있다.
87년 3월 통신교리부 마저 체력의 한계로 교구에 인계할때까지 7년 8개월 동안 1만3천7백48명의 수강생을 접수 그중에 1천4백22명의 영세자를 배출、지금까지 조옹이 입교시킨 자가 1천8백여명에 이른다. 그동안 가톨릭신문은 8백부를 돌파했다. 『 무엇을 알고 믿어야 남을 지도 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 조옹은 교회서적 보관에도 남다른 극성(?)을 갖고 잡지나 신문을 차례로 모아 꼭 필요한 곳에 보내주고 있다.
조회장 자신은 비록 중등교육밖에 받지 못했어도 조상들의 엄한 교육이 몸에 배여 장사꾼을 상대하는 안성군 군농회 과장자리에 있으면서도 청렴결백으로 신음을 얻었다.
「청빈과 겸손」을 좌우명으로 살아온 그는『반드시 주님과 함께 하는 겸손으로 남앞에 나서기를 꺼려 한번도 총회장직을 맡은 적이 없다』면서도 가정과 수백명의 대자와 통신교리자 재교육을 위해서 88년과 9년2월 미리내 성지에서 실시한 가족피정에서 선봉자로 활동해 왔다.
『남편의 속을 모르면 이웃과 자식들로부터 용돈이 궁해서 돈벌이 하는 줄로 오해까지 받았다』는 3살 연상인 부인 신명남(모니까)씨의 말과 고생담에 현직에 몸 담고 있는 기자는 얼굴을 똑바로 들 수가 없었다.
조옹은『가톨릭신문에 요구사항이 있으시다면…』이라는 기자의 질문에『미신자나 초보자를 위한 「문답식」교리해설의 연재와 신학적 용어의 쉬운 풀이가 절실히 요구된다』면서 『딱딱하고 지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난과 교구를 초월한 교회지로의 완전한 탈바꿈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또한『교회는 일관성 있는 행정지도로 본당이 세운 년차 계획을 후임 사목자가 임의로 바꾸는 일과 전임자를 비판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안 좋다』며 조심스런 반응을 보이면서『무거운 짐 진자는 다 내게로 오라』는 덕망의 사제상을 피력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한자는 되지 말기』를 당부하는 조원행 할아버지의 삶에 가톨릭신문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길이길이 보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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