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을 귀 있는 자 들으라』이 말씀은 복음서에서 일곱 번 읽을 수 있고 상황별로는 하느님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실 때(마태11,15),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끝에(마태13,9:마르4,9:루가8,8), 가라지의 비유 끝에(13,43), 등불의 비유 끝에(마르4,23), 그리고 소금 비유 끝에(루가14,35)나온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말할 때마다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종말론적인 통고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느님나라의 완성은 하나의 신비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하느님나라의 완성과정을 설명하는 것이며 이 비유의 말씀을 전하는 복음사가들은 사도교회가 박해를 받으며 난처한 입장에 처해졌을 때 썼다. 그러므로 그 상황 속에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전하는 영상을 그려보면서 하느님나라의 비유를 읽어야 한다.
『제자들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이 말은 마태오가 즐겨 쓰는 말로서 믿음과 관련된 상황에서 쓰는 마태오 특유의 말이다. 『바싹 다가가서』라는 뜻으로 50번 이상 쓰고 있다. 산상설교때나 수상설교때나 제자들은 예수께 가까이 있으면서 예수와 친근한 일단을 이루고 있었다. 이것은 교회를 상징한다. 그들은 예수의 비유의 말씀을 잘 알아들었고 청중도 알아 들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하느님나라를 설명하는 예수의 비유는 쉬운 소재를 따서 설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자들은『저 사람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마르꼬와 루가는 비유의 뜻을 물었다고 하였다) 왜일까. 마태오에 따르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하느님의 신비이며 이 신비를 아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교육용 질문이었다. 그 답을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듣게 된다.
박해를 받던(사실 교회는 언제나 박해 속에 있다) 초대교회는 죽으면서 살고, 지면서 이기는 묘리는 터득하였고 이 묘리는 하느님나라의 신비이다. 『너희들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지혜가 주어졌지만 저들에게는(마르꼬는「밖에 있는 저 사람들에게는」으로 되어 있다) 그것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며『그래서 비유로 말한다.』고 덧붙이셨다. 신비라는 말은 복음서를 통틀어 여기서 단 한번만 나온다.
문제는 다음 대목이다. 성서를 읽는 우리를 당혹케 하는 것은『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 대목이다. 비유로 들려주는「저 사람들」은 지금까지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따라다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면서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갑자기 완고한 사람들로 몰아치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다는 말은 예수님께서도 지적하였듯이 예언자 이사야의 다음 말씀이 예수의 악의의 반대자들을 두고 실현된 예언이었다. : 주님이 이사야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이「패역한」백성에게 말하여라「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며,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이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여라. 그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가려주어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개하고 고침을 받을까 두렵다.」이 예언은 패역무도하게 된 백성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저주였다.
마르꼬 복음서는 예수의 비유를 듣는 사람들을 「밖에 있는 저들」이라고 지칭하여 사도교회시대의 교회 밖에서 박해하는 사람들을 겨냥하였고 이사야의 예언을 요약하여「그들이 회개할까 염려되어」알아듣지 못하도록 비유로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복음사가들은 씨 뿌리는 자는 비유 이야기를 구성하면서 상황전환의 기법을 쓰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주님을 따라다니는 군중이 신비를 쉽게 알아듣기 위한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그 이유 설명을 요청하는 대목에서는 예수의 설교를 악의적으로 반대하는 무리를 겨냥하여 이사야 예언을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당시의 상황에서 복음서 서술시대의 상황으로 무대를 옮긴 것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강론은 그 짤막한 비유로 끝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강론도중에 제자들이 예수께 그 이유 설명을 요구하며 강론을 중단시켰다고는 볼 수 없다. 이유 설명은 강론 후 다른 상황에서 물었던 것을 복음서 구성 때 함께 붙여넣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때 연대순이나 논리적 순서는 상관하지 않고 글을 구성한 것이다.
글 구성의 자의성은 마태오복음서 13장12절 삽입에서 더 잘 드러난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고 못가진 자는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라는 대목인데 이 글은 탈렌트의 비유(마태25,29:루가19,26)와 등불의 비유(마르4,25)에서 잘 맞아 떨어지는 글귀이지만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는 이 글귀가 없어야 읽기가 편하다.
마태오는 하늘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가진 자로, 거절하는 자를 못가진자로 생각하며 이 글을 여기에 삽입하였다. 원초교회는 예수를 기쓰고 반대했던 유대아인들을 못가진 자, 눈뜬 소경, 귀머거리로 생각하였고 그 군상은 교회를 박해하는「밖에 있는 자」로 이전하여 생각하였다. 아무튼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가 힘차게 오고 있고 이를 받아들인 제자들은 행복스럽게도 이를 올바로 보고 제대로 알아듣고 있음을 보장해주고 있다.
구약시대의 대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이 큰 날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그 소식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는데 제자들은 그 큰 은총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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