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 하느님이 세상 안에 현존하신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 한 분 하느님이 세 위격이시다. 하느님에 대한 계시의 이 같은 진술들은 우리에게 역설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언뜻 보면 진실에 어긋나는 것 같으나 사실은 그 속에 주요한 진리를 내포하는 진술들이다. 계시 진리의 역설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생명ㆍ자유ㆍ사랑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요한 5,26)은 세계내의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신 안에 확고히 서서 스스로 존재하고 활동하는 자유로운 분이다. 세상을 창조하고 보존하면서 초월해 있는 하느님이다. 만사의『처음과 마지막』(이사 41,4:묵시1,17)인 하느님은 인간이 파악할 수도 감히 근접할 수도 없는 신비의 영역에 계신다.
그런데 그 분은 당신 영원의 영역을 벗어나 세상과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 생명관계를 지향하는 계약의 체결을 통해 인간을 찾아오고 인간들 사이에 거처를 정하셨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과 인간 사이에 가로 놓인 무한한 간격을 몸소 넘고 인간 곁에 오셨다. 이 장벽을 뛰어넘기 위하여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극복하고 자신으로부터 이탈하셨다. 지존하신 분이 낮은 곳으로 내려와 좁은 공간으로 들어오려면 자신을 낮추고 제한시켜야 한다. 자신을 초월해야 한다. 세상을 무한히 초월하시는 하느님은 세상으로 내려오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초월하셨다. 이 자기초월은 완전한 자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하느님의 초월성은 곧 그분의 절대적 자유를 뜻한다.
그러나 자유는 사랑하는 자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자유로운 자가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는 자는 자유로운 자이다. 자신에게 조차도 얽매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결코 자신 안에 홀로 계시며 자신에 만족하지 않고 타자를 내세우고 그와 관계 속에 계시려 하신다. 이 관계 속에서 하느님은 사랑하고 사랑을 기다린다. 그분은 단지 사랑하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어떤 외적 요인에 의해서 강요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발적인 사랑이다. 하느님은 사랑하는 분인 동시에 자유롭고, 자유로운 분인 동시에 사랑하신다. 그분은 자유로운 분으로서 사랑하고 사랑하는 분으로서 자유로우시다. 자신을 초월하는 사랑의 능력때문에 온전히 자유로운 하느님이 인간과의 깊은 관계를 맺음으로써 인간에게 얽매이는 부자유스런 분이 되셨다. 하느님의 이 역설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되고 절정에 이르렀다.
완전한 연대성
예수의 생애는 자유와 연대성으로 특정지워진다. 그분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재물과 지위와 지배욕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웠다.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자유로웠으므로 철저히 다른 이들을 위해 살 수 있었다. 자신이 누리는 완전한 자유를 남들을 위하여 포기한 결과가 사람들과의 완전한 연대성이다. 그분은 모든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멸시받는 대중들, 나아가 죄인들과 유대관계를 맺었다. 인간성에 뿐 아니라 고통과 죄에 얽매인 인간의 불행한 처지에 적극 동참하였다. 철저히 동화되고자 하였다.
예수의 죽음은 연대성과 자유로 특징지워진 삶의 극치이고 완성이다. 수많은 사람에게 치유능력을 보이고 수많은 사람을 죽음과 죄에서 구해줄 수 있는 그분은 고통을 겪고 자신을 죽음에서 구할 수 없었으며 죄인으로 처형되었다. 그분은 자신을 위하여 온전히 무력한자로 생애를 마쳤다. 이는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로서 남을 위하여 부자유스런 자가 되어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 사랑의 극치이다. 무한한 하느님이 유한한 인간에게, 거룩한 하느님이 죄인 인간에게, 자유로운 하느님이 부자유스런 인간에게 접근하고 당신 자신을 양도하는 방도는 역설이다. 이 역설을 통하여 하느님은 계시하고 구원하신다.
상반 속의 하느님
계시와 구원의 성취인 십자가 위에 매달린 하느님은 여전히 숨어계신다. 『나는 숨어있는 신이다』(이사45,15). 하느님은 무력 안에서 자신을 내어주고 감추셨다. 역설적으로 그 분은 자신을 계시할수록 감추신다. 은폐의 방식으로 계시하신다. 계시된 하느님은 감추어계신 하느님이다. 이 역설은 무한한 하느님이 유한한 인간 사이의 상반에서 기인되고 그 무한한 간격을 극복하기 위하여 하느님이 자유로이 처신하신 사랑의 처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인간에 대하여 누리시는 상반되는 위치를 일치관계로 바꾸시고 또한 당신의 부요를 인간의 가난과 맞바꾸시려는 의도에서 연유한 것이다:『그리스도는 부유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유하게 되었습니다』(Ⅰ고린 8,9). 어떤 교부의 말을 빌린다면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신이 되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역설은 상반되는 하느님과 인간의 처지를 교환하여 서로 일치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로마4,17) 하느님의 전능이 십자가위해서 무능으로 나타났다. 기회 있을 때마다 말씀하시던 하느님이 십자가상 아들의 절규에 입을 다무셨다. 그분은 인간에게 전능의 혜택을 베풀기 위해 무능 속에 계셨고 능력의 말씀을 건네주기 위해 침묵 속에 계셨다. 하느님은 부재(不在)속에 현존하신다. 십자가와 부활로써 나타난 하느님의 신비는 그분의 전능이 무능 안에서 작용하고 인간의 무능과 실패와 결핍이 그분의 전능에 의해 지탱되고 보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느님은 죽음의 공허를 당신의 생명으로 채우기 위해 인간의 공허와 죽음을 스스로 취하셨다.
상반 속의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길은 사랑과 신앙이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면 우리는 믿으면서 사랑할 때에야 그 사랑을 알아들을 수 있다. 우리 신앙은 이 사랑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자유의 선물로 받는 것이다. 『얼굴을 맞대고』하느님을 뵈올 때까지 우리는 사랑과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신비를 흠숭하면서 접근해야 한다:『그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Ⅰ고린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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