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 얼마전 나는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내가 태어나서 소년기를 보냈던 고향에 잠시 들렀다. 내 고향은 맑고 푸르기로 이름난 영동의 오십천이 굽이 도는 작은 강마을이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산과 강은 예전의 것의 아니었다. 산 허리를 잘라내어 강길을 돌려놓았기에, 한참 동안 기억을 더듬은 후에야 내가 선 위치를 분간 할 수가 있었다. 황혼이 지던 강가, 어머니가 나를 부르던 그 옛날 강뚝에 섰다. 햇살 부신 옥수수 밭 사잇길을 달려가 모래성을 쌓고 땅거미가 질 때까지 놀던 그 강변에는 콘크리트 아파트가 줄지어 섰고, 이무기가 산다던 그 전설의 미륵소에는 흙먼지를 뒤집어 쓴 온갖 쓰레기가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30여년 전 과거를 거슬러가는 내 기억의 초점이 명료해 질수록 언제나 내 마음속에 빛나던 추억의 강은 더욱 투명한 빛으로 나의 내면에 다가서지만 내 눈 앞에 보이는 강은 그때 그 강은 아니었다. 검은 폐류를 둥둥 띄우고 더운 열기 속에 번뜩이는 강은 마치 산짐승의 배를 갈라 놓은 듯 섬뜩이는 빛으로 흐름을 멈춘채 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
▨둘 : 나의 눈빛과 그 낯선 강의 원망어린 눈빛 사이에 마주치는 절벽 같은 침묵으로 매스꺼움이 목에 까지 차 올라 오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저 무자비하도록 파괴된 자연에 대한 감상어린 연민, 그 이상의 뜨거운 감정이 내 앞에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끝없는 시간의 흐름속에 서서 바라보는 무상한 현실. 인간만이 갖는 꿈과 현실의 그 아득하고 막막한 거리감이야말로 이 지상에서 인간이 감내해야할 숙명적인 슬픔인 것을 나는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었다.
나에게 고향이란 내 꿈과 현실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내 영혼의 휴식처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어머니품에서 최초로 찬란한 햇살을 쏘인 곳이요, 최초로 고통과 슬픔이 무엇인지를 느낀 곳이요, 즐거움과 기쁨이 어울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나의 고향은「그리움의 공간」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마음은 이 세상에 사는 그 누구인들 예외가 있을까.
▨셋 : 나자렛 예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였던 것 같다. 갈릴래아 가파르나움 회당의 설교로 부터 시작 된 예수의 전도여행에서 그의 제자들을 파견하기전 예수는 자기의 고향 나자렛에서 마지막 설교를 한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주고 눈 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가4, 18). 이 메시지는 새 세상이 시작 된다는 희망의 메시지요 이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예수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 지고 있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동향인들은 그의 메시지를 배척하였다. 어릴적부터 예수를 잘 알고 있는 그들은 목수 요셉의 아들로서 평범한 인간이상 아무것도 더 될 수 없다는 선입견으로 예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 넷: 인간이 갖는 고정관념과 선입견, 편견과 아집은 진실을 외면하게 하고 진리앞에 인간의 눈을 멀게 한다. 모든 죄와 불신이 또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다. 예수를 바라보는 「나자렛 사람들의 눈」은 바로 「이 세상의 눈」이라 할 수 있다.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힌 눈이요,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고 이웃을 경멸하는 눈이요, 고정관념과 선입견으로 헤어날 수 없는 폐쇄적 사고의 틀 속에 갇힌 눈으로 자기 안보와 안정을 위해서 잘 길들여진 눈이다. (그러기에 나자렛의 이 사건은 앞으로 올 예수의 일생을 미리 예시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시대에 이러한 눈을 지닌 자들의 전형적인 부류는 바라사이들과 율사들이라 할 수 있다. 진실을 외면한 이들의 표리부동한 삶의 허구성을 예수는 신랄히 비난했다 (마태 23, 13-33).
그리고 예수를 향하여 『네가 무슨 권능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런 권능으로 주었느냐』 (마태21、 23)고 예수의 합법적 권능 여부를 시비로 삼았던 대제관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또한 이런 자들의 대표적 인물이였었다. 예수를 재판하고 예수를 처형한 자들이 바로 이들이였음은 우연한 사실이 아니라고 본다.
▨ 다섯 : 예수를 배척한 나자렛의 사건은 오늘 우리 가운데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사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현대세계사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분단은 아픈 상처를 간직한채 아직도 우리는 남과 북이 두터운 불신의 벽을 쌓고 살고있다. 이 무서운 불신의 벽 아래 편견과 아집으로 응어리진 지역감정을 앞세운 「지역분열주의」라는 늪에서 민족의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있지 않은가?
분단속에 다시 분열을 부채질하는 「지역감정」이란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집단의 옹졸하고 비겁한 열등감에서부터 생기는 잘못된 우월의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세계 어느나라에도 이러한 지역주의는 있지만 이번 광역선거를 두고볼때 우리의 경우는 참으로 심각한 우려를 금할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는것 같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는 우리에게 민주화는 물론이고 민족의 통일은 하나의 허황된 꿈과 같은 것이라고 나는 본다.
철저한 지역주의의 고질적인 증오와 경멸을 일삼던 「사마리아」와 「유다」사이에 죽음으로써 그 벽을 허물고 그들 사이에 새로운 길을 놓으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십자가를 지신 예수는 분단과 분열 속에 고통받는 민중 가운데로 걸어 오고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 가운데 예수는 영남지방에는 외로운 호남사람으로, 호남지방에는 홀로 남은 영남사람으로 와 계실것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보다는 맹목적인 전통성을 고수함으로써 자신과 자기집단의 안보와 안정만을 위하는 제도교회 안에서의 잘못된 보수주의자들 가운데 예수는 가난하고 쫓기는 자로서 와 계실 것이다. 잘못된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의 참된 회개 없이는 우리 가운데 와 계시는 예수는 그의 고향, 나자렛에서와 같이 우리 교회안에서도 기적을 행하실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이시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우리의 눈을 어린이와 같이 갖도록 노력할 때만 이 십자가 안에서 부활이 이루어졌듯이, 절망처럼 보이는 곳에서 희망이 자라고, 죽음처럼 보이는 곳에서 생명은 탄생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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