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몇번이나 남을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다음 용서에 관한한 세상에서 터무니없는 이기주의가 성행하고 있음을 개탄이라도 하듯 한 비유를 들어 가르치신다.
그 비유는 빚진 것을 처리하는 한 왕의 처사를 하늘나라에서 죄를 용서하는 하느님과 비겨 설명하는 비유이다.
왕은 일만 탈렌트라는 거액의 빚을 진 종을 그의 애원으로 전액 탕감해 주는 자비를 베푼다. 그 종은 동료 종에게 백 데나리온이라는 소액의 빚을 받을 빚장이이기도하다. 빚장이 종은 빚꾸러기 종을 무자비하게 다룬다.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왕에게 이 일을 일러바쳤고 왕은 노여움을 터뜨려 빚장이 종을 붙잡아 형리에게 넘긴다. 그리고 서로 용서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끝난다.
그런데 이 비유에 나오는 상황들은 그때나 오늘이나 정상적인 생활의 상황을 훨씬 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예로 등장함에 의아하게 된다. 우선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고자 하는 어떤 왕과 같다』라고 한 것은 하늘 나라를 설명하는 다른 비유에서도 같은 형식으로 되있지만 비교의 두 대상이 적절하지 않다.
유대아인들의 비유에서는 하느님을 왕으로 자주 비유한다. 그러니 여기에서도 하늘나라에서 하느님이 하는 일은 어떤 왕이 하는것에 비길 수 있다는 뜻이다. 본래 원문대로는 「왕으로 있는 어떤 사람」에 비긴다고 하였다. 이 표현은 상상적인 왕이 아니라 실제적인 왕을 표시하려는 표현이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고 불러 모았는데 여기서 왕은 종들에게 대하여 빚장이로 묘사되었다. 그런 왕이 있을까. 봉건시대에 대성주는 자기 백성들과 소작료를 셈하였다. 아니면 왕노릇 하는 이 사람은 자기 신하들을 불러 모으고 재무보고를 들었을까.
더욱 의아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 중 한 사람이 일만 탈렌트의 빚을 진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일만 탈렌트는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이다. 일만 탈렌트는 6천만 데나리온이고 한 데나리온은 한 노동자의 정상적인 하루 품 삯이었다. 그러니 일만 탈렌트는 6천만 데나리온이고 노동자가 6천만일 일해서 받을수 있는 돈이다. 오늘의 우리 나라 시세로 따지면 노동자의 하루 품값을 5만원 잡으면 2천5백억원이다.
예수 당시의 헤로데왕의 1년 총소득이 9백탈렌트였으며 갈릴래아와 베레아에서 걷히는 세액이 연간 2백탈렌트였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일만 탈렌트라는 거액의 빚은 사실상 한 개인에게는 불가능한 엄청난 금액임을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한 종이 왕한테 이렇듯 거액의 빚을 졌다는 것은 상식에 벗어난다. 『셈을 시작하작…그는 왕앞에 끌려 왔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 신하로서 왕의 재산 관리 중 부정을 행했다는 가정도 금액의 거액으로 볼때 상상할수가 없다.
왕은 받을 것은 받을 심산이다. 갚을 길이 없거든 네몸과 처자와 그밖에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는 것이었다. 빚돈 때문에 사람을 파는 것은 구약성서에 가끔 언급되지만(열왕한4,1: 이사50,1. 아모2,6;8,6: 느헤5,1~13) 이것은 이방인들의 행태로 되어 있고 이스라엘의 법이 아니었다.
유대아법은 광범위한 보호 조항을 두고 있었으며 도둑질한 경우에만 사람을 파는 것을 허용하였다. 빚꾸러기는 애원하는 수 밖에 없었고, 왕은 그 애원을 듣고 자비를 베풀어 빚을 몽땅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왕의 자비와는 대조적으로 인간의 무자비가 나타난다. 탕감받은 종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종을 붙들고 닥달을 하였고 빚진 사람의 애원도 듣지않고 그를 감옥에 쳐 넣었다.
백 데나리온은 일만 탈렌트의 60만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좀 참아주면 갚겠다는 나중 빚꾸러기의 애원은 가능한 것이었다.
이에반해 첫번째 빚꾸러기의 나중에 갚겠다는 말은 진실성이 없다. 그는 결국 왕의 노여움을 사서 마지막 한푼을 다 갚을때까지 감옥에 갇히는데 그 거창한 빚은 도저히 다 갚을 수가 없을것이다. 그에게는 희망이 없게 되었다. 그 벌은 자업자득으로 자기가 동료에게 내렸던 처단과 꼭 같은 벌이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비유는 의도적으로 과장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 사정은 인간의 상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만큼 초월적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교훈이며 상상할 수 없을만큼 거액의 빚은 인간이 하느님한테서 받은 은혜가 헤아릴수 없이 크다는 것과 인간은 그 은혜의 6만분의1이라도 이웃에게 베풀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비유를 마감하는 말 『너희가 진심으로 서로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이와같이 다룰것이다』는 말은 주의 기도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라는 기원으로 공동체의 공식기도가 된것과 연관성이 있다.
31절에 다른 종들이 몹시 분개하여 그 일을 왕에게 일러바쳤다는 대목의 「분개하여」는 17,23절에서 제자들이 주님의 수난예고를 듣고 매우 슬퍼하였다라는 「슬퍼하다」라는 말과 똑같은 단어를 원문에서 쓰고 있다. 이것은 두 경우 다 초생교회공동체가 이런 일을 접하고 비통해 했다는 뜻이다.
결국 마태오복음서에 나타난 예수께서는 교회공동체가 형제들끼리 서로 돕고 사는것만이 하느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는다는 교훈을 주는 것으로 18장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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