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 얼마 전 필자는 전국에서 모인 젊은 사제들의 피정에 참석한 일이 있다. 그곳에서 피정강론을 맡았던 어느 신부님의 말씀에 우리는 한바탕 폭소를 터뜨려, 한여름 무더위를 잠시나마 잊을 수가 있었다.
어느 교구 사제 피정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열강을 하는 피정지도 신부의 말씀을 보청기를 끼고 열심히 듣고 있던 어느 노 사제가 갑자기 보청기를 빼고 물끄러미 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곁에 있던 사제가『왜 보청기를 빼 놓고 계십니까』하고 물었더니『저런 강론을 듣기에는 보청기 밧데리가 아깝다』고 대답 하더라는 것이다.
나자렛 예수가 그 생애를 통해 가르치신 진리를 큰 산에 비유 한다면 그 사람이 서있는 위치에 따라 그 산에 대한 인상도 각양각생 일 것이다. 나는 「내가 믿고 알고 있는 하느님」이「실제로 예수가 가르치신 그하느님이신가? 」에 대한 두려운 회의에 빠질때가 있다. 세례를 받은 이후 지금까지 내가 믿고, 의지해온 그분이 때떄로 내앞에 너무나 낯설기만 한것은 웬 일일까. 아마도 그것은 내가 그분의 가르침과 행동양식을 제대로 따르지 못했기때문 일 것이다.
예수의 삶을 추종한다는 것은 외적생활양식을 모방하는것 뿐만 아니라 특별한 방법으로 그분과 결합되어 있음을 가르킨다고 해야할 것이다. 즉 그분의 인격에 내가 결속되어 나의 믿음속에 그분이 현재적으로 나타나야 되고, 그분의 인격적인 삶에 동참함으로써 내 삶의 내용이 전적으로 변해갈때 비로소「그분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의 핵심을 지관적으로 간파했던 사도 바울로는『나에게는 사는 것이 곧 그리스도』 (필립1, 21) 라고 했으며『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갈라2, 20) 라고 그는 고백했다. 그분이 내 안에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나름 대로 그분의 우상을 만들게 될 것이다 (출애20, 4~6참조).
돌과 구리로 만든 우상보다 마음으로 만든 우상은 더 위험한 우상이 되고 말것이다. 왜냐하면 돌과 구리는 깨어 부수뜨릴수 있지만 마음의 우상은 그리 쉽게 부수어 버릴수가 없기 때문이다.
▨둘: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예수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분의 그 요구속에 예수의 제자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방법으로 복음을 전해야 되는지 말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의 내용을 미루어 그들이 전해야 하는 그 메시지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알수 있다고 본다.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가르치시던 예수는 열두 제자를 불러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다. 길을 떠나는 그 제자들이 소지할 것은 지팡이 하나 뿐이다. 양식이나 돈, 심지어 입을 옷이나 기타 일용품도 일체 가져가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리고 편의에 따라 맘에 드는 곳을 찾아 돌아다닐 것이 아니라 한집에 머물러 있을 것이고, 숙박이나 체류를 거절당하거나 그들의 가르침에 무관심하다해도 그들을 귀찮게 굴거나 원망하지 말고 그들의 관습대로 (발에 먼지를 털어버림) 그곳을 미련없이 떠나라고 하신다.
즉 공연히 논쟁 같은 것으로 시간을 소비하지 말라는 것이다(마르 6,6b이하 참조). 이러한 예수의 요구는 직접적인 예수의 제자들 뿐 아니라「예수의 길」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씀 일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사람은 몸가짐과 일하는 방식 모드를 최대로「간소화」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물질적인 소유이든 정신적인 소유이든 간에 우선 소유로부터 철저히 자유로와야 된다는 것을 예수는 강조하고 있다.
이「철저한 포기」의 요구는 복음의 메시지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에게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들의 해방을 위해서 그들에게 단순한 이론이나 위로의 말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그리스도의 강쟁의 신비가 또한 감추어져 있다고 본다. 복음선포의 조건으로 사회적이고 경제적 조건이 아니라 한 주인만을 섬기려는「믿음」이 선교의 첫 조건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셋: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그분의 말씀 가운데 더욱 돋보이는 말씀으로「지팡이 하나만은 가져가라」는 까닭은 도대체 무슨 의미 일까. 지팡이는 생명의 또 다른 하나의 상징이다/ 구약시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사린 엘리사의 지팡이가 그렇고 에집트에서 억압 당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살려 낸 모세의 지팡이가 그렇다. 죽은 것을 되살려 내시는 하느님의 생명에 의지하여 꿋꿋이 자기의 길을 가라는 뜻이 아닐까. 삶의 고된 언덕위를 오를 때, 인생의 위험한 깊은 골짜기에서 이웃에게 모자라는 팔을 건네고 싶을때 우리의 팔과 다리를 연장 시킬수 있는 그 지팡이는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자요 스승이신「예수」자신이요 그분께 의지하는 우리의 믿음이 아니겠는가. 스스로의 힘을 믿는 자에게 지팡이는 오히려 짐스러운 것이나 자신의 허약함을 간파하고 있는 자에게 지팡이는 더없이 소중한 것이 될 것이다.
▨넷 : 예수의 제자들의 이 파견기사는 오늘 우리교회에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가? 가난하고 억눌린자들의 해방을 선포하신 해방자 예수를 오늘 우리는 이 땅에 어떻게 선포 해야 하는가?
아직도 수천명의 양심수들이 어둠 속에 같혀 신음하고, 못배우고 가는한 자들이 무시 당하고, 버림 받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이땅에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아들들이 드러나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이 세계안에서 (로마8, 19~22참조) 자연과 인간이 함께 그 삶의 위기를 맞고 있는 이 시대의 벼랑 끝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있는 누구에게「기쁜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되는가.
『의인은 없도다. 하나도 없도다 / 지각있는 자도 없도다. /모두가 비뚤어졌고 다 몹쓸 것들이 되었도다/좋은일을 하는 자 없도다.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벌어진 무덤이요/그들의 혀로는 속임수를 일삼으며/그들의 입술 밑에는/살무사의 독이 있고/그들의 입은 저주와 독설이 가득하도다/그들의 발은 피를 쏟는 데 잽싸고/그들의 길에는 파멸과 비참이 (따르며)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는 도다/그들의 안중에는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도다』 (로마3, 10~18참조).
구약의 에언자와 시인들은 의인을 찾고 있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느님은 의인을 찾아 굳게 참긴 우리들의 문 밖에서 외치고 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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