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좋은 것이지만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다.
기도는 신앙안에 있는것이다. 누가 정말 신앙인이라면、그리고 하느님을 자기 생활속의 현실로서 받아들인다면 그분과 함께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신부님、제가 하느님께 얼마나 자주 기도하며 도와달라고 청했는지 아세요? 그러나 결과는 내 생각과는 영 달랐어요. 하느님은 한번도 내 청을 들어준 적이 없어요!』 한 젊은이가 한 말이다. 마치 책망하는 듯한 불만의 표시였다. 아마 우리들도 이 젊은이와 똑같이 말하고 싶은 때가 많을 것이다.
예수는 자기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요구하셨다(루까18、1~8). 하느님은 도대체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시는가? 그렇다면 왜 그분은 우리가 청하는대로 해주지 않는가? 우리가 하는 기도는 허공속의 외침이던가? 아무런 반향없는, 대답없는 외침인가? 청원의 기도는 오늘날 많은 신자들에게 하나의 어려운 문제가 되어있다. 기도하는 것을 참으로 어렵게 생각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몇가지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가 무기력하기에 기도하는가?
어린 아이는 어른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무엇을 만들어 냈을 때 아주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자기 혼자서 해낼 수 없을때는 또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곧 아버지나 어머니한테 도움을 청하게 된다.
사람은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남의 도움을 청하는 것을 어렵게 여긴다. 자신의 나약함을, 자기의 무능력을 고백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기의 약점이 노출되었을 때 다른 사람한테 이용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가능한 한 남의 도움을 청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느님에게도 이와 비슷하게 처신한다. 사람은 독립심이 있어야 하고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기 보다는 자기 스스로의 힘에 의지해서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경우에만 하느님께 향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청원 기도와 인간의 게으름
기도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까닭은 우리가 청원기도를 잘못 파악하고 있는데도 원인이 있다. 사실 우리는 우리들의 책임이요, 우리들이 해야 할 일들을 마치 하느님의 책임인 것 처럼 전가하고 있다.
시험을 대비해서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서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우리 주변에 화해를 위한 첫걸음을 시도하지는 않으면서 하느님께 인류의 평화를 빈다든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으면서 굶주린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시라고 기도한다.
우리는 또 병자와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우리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사실 많은 일들이 우리가 스스로 해야할 일이며 우리의 책임 임에도 우리는 너무 안이하게 이들을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께 자신의 책임을 전가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어떤 효과를 내는가?
청원기도의 한 모델을 생각해보자.
한 어머니가 어린이와 함께 백화점에 갔다. 어린아이는 어머니를 끈질기에 졸라대었다. 결국 어머니는 할 수 없이 아이가 갖고 싶은 것을 사주게 됐다. 과부의 끈질긴 청원에 재판관은 할수 없이 그 청을 들어주게 된다는 성경말씀(루까18、1~8)과도 비슷하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과 본격적인 협상을 시도하기도 한다. 즉 당신이 이렇게 해주면、당신이 이 일에 도움을 준다면 나는 이렇게 하고 또 이런 선행을 하겠다고 약속한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하느님을 설득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내편에 서서 나를 위해 내 생활에 필요한 것을 들어줄 마음을 갖도록 하느님을 설득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정말 무엇이 좋은 일인지 모를 때 가 많고, 무엇이 꼭 필요한지 착각하는 수도 있다. 만일 하느님이 좋은 아버지(또는 좋은 어머니)처럼 우리에게 대해주신다면 그분은 자발적으로 우리를 걱정해주고 우리의 삶에 정말로 필요한 것을 기꺼이 해줄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을 설득시킬 필요가 없다. 하느님이 혹시 우리를 잊어버리고 지나칠까봐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하느님은 좋으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변화시켜야 할 분은 하느님이 아니다. 바로 우리자신이 변화돼야 한다. 모든 좋은 대화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가 훌륭한 대화가 되기위해서는 하느님을 설득하고 간섭하려고만 하지 말고 오히려 그분의 대답을 들으려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그분이 우리에게 명백히 해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을 자세가 돼있어야 할것이다. 물론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하는 태도이므로 볼 수 있는 사람에게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미 많은 신자들이 고요한 묵상가운데서 하느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보시는지、또 그분이 중요하다고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바 있기 때문이다.
옳은 기도는 어떻게?
기도는 신앙의 일이다. 우리가 인용한 성경 말미에 예수는 아주 불안한 질문을 하였다『사람의 아들이 올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습니까?』
누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믿는다면, 하느님을 자기생활의 현실로서 생각한다면 그는 어렵지 않게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을것이다. 이런 대화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 생활에 참여하도록 해주고、우리 마음에 좋은 것을 그분에게 전달하고、우리에게 기쁜 일이나 또는 걱정스런 일이나 모두 그분에게 말씀드릴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생각과 뜻을 들을 수 있도록 마음속으로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마 하느님은 우리에게도 암시해주시고 또 어떤 때는 특별한 부르심을 갖고 계시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를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
기도가 도움이 되는가?
기도가 도움이 된다는 말의 뜻은 우리가 짧은 기도를 했을 때 즉시 우리가 바라던대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식의 뜻이 아니다.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점은 이 세상을 지배하시는 분、또 무엇이 언제 어떻게 왜 일어나야 하는지 알고계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결정을 내리고 하느님은 이 결정을 따라 집행하는 그런 분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시야를 넘어서는 것은 거의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하느님은 자기의 좋은 은혜들을(자기의 좋은 성령!) 우리에게 주려고 준비해놓고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충분히 주지시켜 주었다. 내가 기도했으나 내가 바랐던대로 되지않고 가끔 영 다르게 되었다 해도 나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그분은 내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리라 믿고 있다.
바로 이런 기도안에서 그분은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깊이 깨닫도록 해주신다.
기도는 이렇게해서 참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다.다시한번 그리고 항상 다시 기도해 보기로 시도해 보지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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