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한 나라의 밥상문화가 그문화권의 감추인 정신을 드러내듯이 감추인 정신을 드러내듯이 한 사람의 인품도 그가 먹고 마시는「모양새」에서 나타난다고 본다.
세계 어느 도시를 가봐도 우리나라 도시처럼 식당과 술집이 많은 나라는 없는 것같다. 먹고 살리 어려웠던 시절에는 이웃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식사때에는 아름다운 예의로 삶의 향취를 북돋았으나「잘 살아 보세」라는 새마을 노래가락이 산천을 뒤흔들고 난후 불과 수십년, 우리는 우리의 고유맛을 잃었을 뿐아니라 풍부함 속에 오히려 절대빈곡을 니끼며 살고 있다. 개소주, 고양이, 오소리 등 식품아닌 식품이 각광을 받고, 이제는 살아 있는 곰의 쓸개까지 빨아 먹는 잔인하고 역겨운 퐁속이 우리 사회 깊숙히 파고 들어오는 것은 오늘 우리의 정신문화의 그 근본이 흔들리고 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불교문화권의 전통에서 볼때, 음식을 생명처럼 소중히 다루는 까닭이「자비의 정신」에 기인한 것이라면, 이러한 현상은 이기적인 향락속으로 타락해 가는 인간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현상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성장한 동물은 먹이를 두고 제 어미와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지만 인간에게「먹고 마심」은 식욕을 충족시키는 본능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행위히다. 「음식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곧「생명을 함께 나눈다」는 것이고「생활을 함께 한다는것」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있어서「먹고 마시는 행위」는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모든 문화권에서, 제의 양식은 물론 일상생활 깊숙히 자리 잡고 있는 인간의 원초적 상징석을 띤 행위라고 할것이다.
「음식을 함께 먹는다」고 표현하지 않고 굳이「음식을 함께 나눈다」고 표현 하려는 것은 식사를 함께 함으로써 「생명과 사랑」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깃든 표현이 되기 때문 일것이다. 가족 공동체를 가리켜 우리는「한 솔에 밥을 먹는 사람」으로 지칭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둘:나자렛 예수는 그 생애의 중요한 시전에서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있다. 그리고 오늘 우리 교회의 모든 전례 가운데 근간을 이루고 있는 성체성사가 음식을 함께 나누는 잔치의 성격과 제물을 바치는 제사의 성격을 띤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함께 나누어 먹고 마시는 상징적 행위는 자신의 삶을 이웃과 나누고, 이로써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는것을 의미한다.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기적사화 가운데 은식과 관련된 몇가지 기적이 있다. 그 가운데「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개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이 있다. 이 기적사화는 다른 그 어느 예수의 기적보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삶의 아이러니가 반짝이는 보석처럼 숨겨져 빛나고 있다.
요한복음 6장1절에서 15절에 보고되는 이 거적사화는 첫세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없이 강력한 그들의 체험이 담긴 것이었다고 성서학자들은 말한다. 왜냐하면 네복음사가 모두가 이 사건을 동일한 목적 아래 기록하고 있지 때문이다. 도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난 선물을 받았던 과거 사건을 되새기고, 성체성사라는 미래의 사건을 예시하는 기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요한 복음사가는 이기적인 시기가 과월절이었음을 상기 시킴으로써 위의 두 사실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요한 6, 4)
■셋:예수는「기적」으로써 신앙의 근거를 제고하는 가치부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보지않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요한20, 29)고 했다. 이 기적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생명과 사랑을 인간과 함께 나누는, 인간에 대한 예수의 연민을 통해 오히려 예수야말로 진정한「하느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이심을 복음사가는 고백하고있다. 여러가지 치유의 기적을 직접 목격한 군중들은 예수와 그 제자들을 따라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이들을 바라 보신 예수의 눈에는 이미 이 기적이 예시되고 있다. 군중들이란 그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눈앞에 보이는 신비로운 기적과 자신과 가족이 다함께 복을 받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지리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 군중이 예수의 가르침을 올바로 알아 듣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이 기적사화 바로 뒤에서 읽을수 있다. 예수는 이미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파 하고 있지만, 그들의 심중을 떠보기 보다는, 그들의 그 목마른 눈빛속에 오히려 깊은 연민과 자비의 손길로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예기치 못했던 하늘 나라의 기쁨을 선사하셨다. 이런면에서 예수는 인류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불차와의 근본적으로 다른 일면을 보여 주교있다. 나자렛 예수는 구체적 인간실존 상황, 그 삶의 한 가운데로 직접 들어오시어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를 펴시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예수는「길 안내자」가 아니라「인간의 구원자」로서의 면모를 우리에게 시사하고있는 것이다.
■넷:두번째로 이 기적이 우리에게 더욱 감동적으로 와닿는 이유는 기적의 배경이 되는 상황묘사에 있다고 본다. 왜 하필이면「철부지 어린아이 손에 들여진 빵과 물고기」였을까? 이 사실에 대하여 성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지만 이 평범한 사실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예수의 가르침은 더욱 선명한 빛으로 어둠속에 갇힌 인간의 고정관념을 밝혀 진리의 빛으로 이끌고 있다. 그 의미는 우리가 순진 무구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보잘것 없이 작은것이지만「자기가 가지고 있는것」을 진심으로 나눌때 하느님의 능력은 생명과 기쁨의 기적이로써 우리 가운데 일어 난다는것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결코 많고 적은 분량이 문제가 아니라 동전 한닢을 넣은 과부와 같은 순수한 나눔으로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자기가 지닌 것을 이웃을 위해 내어 놓을때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행위임을 말하고 있는것이 아니겠는다.
■다섯:이 세상에서 교회 공동체는 제도와 체제를 어쩔수 없이 유지해야 되겠지만, 인간의 전략전 가치관에 의지하여 그 체제를 고수 하는데 전력을 다 한다면 교회는 복음의 논리를 망각할뿐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을 축소시키고 말 것이다. 참된 나눔이 없는 종교는 자비를 상실한 악마적인 형태로 그 종말을 맞는다. 온국민의 치를 떨게 했던 오대양사건은 이 사실을 극병하게 드러 냈다고 본다. 예수는 자비심을 상실한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싸웠다. 자비를 거부하는 것은 곧 생명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광활한 우주의 작은 흑성가운데 하나인 이 작고 아름다운 지구의 생명도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것과의 관계에서 참된 모든 것과의 관계에서 참된 나눔을 이루는「공생적 사회」를 이루지 못할때 이 지구는 더이상 인간을 위한 것이 되지 못할것이다. 참된 나눔의 있는 곳에는 생명의 신비가 바다처럼 열려오고, 기쁨과 평화가 눈부신 햇살처럼 그 위에 찬연히 빛날 것이다. 『고통도 나누면 기쁨이 된다』는 우리시대의 성녀 마더 데세사의 말씀을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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