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
생명의 흐름을 차단하는 현대산업사회의 공해가운데 소음의 공해는 또하나 무서운 공해가 아닐 수 없다. 좀 심하게 표현 하자면 소음공해란 것은 메마른 현대인의 정서를 더욱 황폐하게하는 산업사회의 집단적 고문의 일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도시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수도원 분원에 살고 있는 필자의 경우 하루 한 순간이라도 이러한 소음을 피해서 살수는 없다. 하지만 일요일 새벽만큼은 다르다. 울다가 지쳐 곤한 잠에 떨어진 아이처럼 일요일 새벽의 도시는 적막하리 만큼 깊은 고요가 깔려있다.
내 자신의 체험을 확대하고 미화해서가 아니라 며칠전 어느 주일 새벽에 있었던, 잊을수 없는 체험 하나를 여기 적어 보기로 한다. 한차례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어느 주일새벽, 나는 유난히 아름다운 새소리에 잠이 깼다. 꿈결인듯 싶어 다시 눈을 비비며 자리에 일어나 앉았으나 참으로 신비스러운 새소리는 여전했다. 어느 깊은 애증으로 가슴에 묻어 두었던 슬픈 한과 애원을 호소하듯, 그 새는 길고 긴 목청으로 흐름이 끊인 물밑 같은 고요를 흔들며 창밖에서 홀로 울고 있었다.
잊혀졌던 어느 빈 터를 환히 밝히며 피었던 달맞이 꽃이 그 어느 순간 적막한 아름다움으로 고개를 숙이듯 끊어질 듯 다시 이어가는 청아한 풀빛 울음소리, 그 아름다운 새 소리는 내 무딘 감성과 잠든 의식의 세계를 한꺼번에 뒤흔들어 놓는 예기치못했던 하나의 충격이었다.
■ 둘: 그 새벽, 어린왕자의 작은 혹성같이 지극히 왜소해보이는 지구 위에 석상 처럼 홀로 앉아 있는 나의 모습을 나는 오랫동안 지켜 보았다. 지금까지 나와함게 살아온 나의 낯설은 얼굴들이 하나씩 희미한 내 기억 속을 지나고 있었다.
이미 지나가버린 나의 과거도, 나의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나의 미래도 자비로운 하느님의 손에 의해「구원되어야 할 존재」라는 것이 가슴져며지도록 내안에 뜨거운 의미가 되어 살아 나고 있었다.
눈을 들어 다시 창을 바라 보았지만 새 소리는 간데 없고, 물빛 여명이 투명한 유리창에 마지막 어둠을 밀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이 적막의 휘장을 찢어내듯 질주하는 자동차가 무거운 침묵을 가로 질러 또 하나의 침묵으로 멀리 사라져갔다.
■ 셋: 잿빛 콩크리트 옹벽으로 단단히 둘러쳐진 이 거대한 도시, 단절과 소외, 불신과 증오로 높고 높은 담을 서로 쌓고 살아가는 인간의 도시, 그 죽음 같은 고요 속으로 날아든 이름모를 새는 무슨 까닭이 있어 그토록 슬피 울다 사라졌을까 무서운 폭풍우 속에 가족과 둥지를 잃어버린 것일까…
이세상에서 생명이란 때때로 처절하리만큼 슬픈 논리를 지닌 것이지만 생명보다 더 아름다운 신비는 없는 것 같다.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가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한줌 핏덩이와 같이 여린 생명이 되어 어린 마리아의 품에 안겼던, 그 강생의 신비가 말해주듯, 생명보다 더 고맙고 신비로운 하느님의 선물은 없을 것이다.
■ 넷:『내가 생명의 빵입니다. 내게로 오는 이는 결코 굶주리지 않을 것이고 나를 믿는 이는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요한6, 35)라고 나자렛 예수는 자신을 선언하고 있다. 오늘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도 그러하지만 예수시대의 사람들, 그를 가장 가까이 따라 나섰던 예수의 제자들까지도 그들이 예수로부터 원했고 바랬던 것은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이었다. 물론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나라」는 세상의 삶을 무시하고 저 세상의 영원한 생명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였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는 그 어느 종교 보다도 현세의 삶을 소중히 생각하는, 이른바 역사성을 중요시하는 종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이 세상의 삶이 이미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누리는 생명으로 연결지어진, 초월성이 배제 된 가르침이라면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은 아닐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영원한 생명의 빵이다』(요한6, 24-35참조)라는 예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빵(음식)으로써 우리가 육신의 생명을 지탱하듯이 예수의 말씀과 가르침이 내 삶의 양식이 된다는 것은 나자렛 예수, 그분 자신이 내삶의 마지막 근거를 지탱해주는 최종근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이 믿음은 우리의 신앙고백이 될것이다. 그 누가 예수와 함께 마셔야 할 잔을 거부하고 예수로부터 현세적인 가치만을 찾아 나선다면 그는 가파르나움의 예수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떠나 갔듯이(요한 6, 66) 오늘 우리시대에도 이런 사람들은 예수로부터 실망하고, 당혹스럽고, 거북스러운 체험으로 마침내 예수로부터 멀어지게 될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께 진정으로 구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라면 예수를 내「생명의 양식」으로 믿고 살아 가게 될것이다.
■ 다섯: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간것입니다』(1요한 3, 14)라는 요한복음사가의 말씀과 같이 예수를 통하여 썩어 없어질 묵은 인간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리와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새로운 인간」으로 끝없이 새롭게 창조 되는 것을 또한 말하고 있다.
다시말하자면 인간은 그분 안에서 거듭 태어남으로써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생명이란 저 새벽의 여명 속에 죽음 같은 적막을 흔들어 깨우던 새의 울음같이, 야단스러움도, 요란함도 없이 꾸밈없는 무위의 넉넉한 흐름으로 맑고 투명한 물처럼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내면으로 은밀히 흐르는 강과 같은것이다.
인간도 자연도 그 흐름의 맥이 끊어질 때 죽음은 돌이킬수 없는 심연처럼 그들을 삼켜 버릴것이다. 오늘 우리들의 삶, 그 한가운데 저심연의 골은 얼마나 깊어 지고 있는 것일까. 몇몇 가진자들의 그 매정하고 비정한 오만으로 자손만대에 물려 줄 아름다운 자연은 파괴 되고 우리의 영혼은 죽은 나자로가 바라보던 그 심연 만큼이나 서로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저 아름다운 우리의 국토에 불치의 상흔처럼 무분별하게 무수히 파헤쳐진「골프장 건설」은 우리앞에 바로 이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생명의 흐름이 차단된 곳에는 자비가 없고, 자비가 없는 곳은 이미 생명은 끝나고 죽음의 종말이 찾아 온 곳이라 할것이다. 생명은 사랑의 나눔으로부터 시작하여 형언 할수 없는 신비로 성장하고 발전하다.
그리고 살았는 모든 생명의 신비속에 감추인 저 찬란한 기쁨을 가르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눈으로 볼수 있는 하느님의 숨결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살아계신 하느님(호세3.10: 시24.3)의 아들로서 예수는 우리 가운데 생명의 양식(빵)으로 오셨고 지금와 계시고 또 앞으로 우리 가운데 다시 오실것이다. 나자렛 예수, 그분 홀로 우리 모든 이의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 된다는 확신에 찬 믿음으로 빵을 떼어 나누어 먹을 때 마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으며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리라는 크나큰 희망의 설레임으로 사는 사람들, 그러기에 우리는 이들 그리스도인을 가르켜「영원한 구원(생명)의 상속자」라고 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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