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 인류가 언제부터 술을 마시게 되었는지 필자로서는 그기원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유대인의 생활을 지탱해준 「탈무드」에는 이런 얘기가 있다. 『이 세상 최초의 인간이 포도종자를 심고 있었다. 악마가 거기와서 「무얼하고 있소」하고 묻자, 인간은 「나는 훌륭한 식물을 심고 있소, 이 열매는 달고 향기로와서 그즙을 마시면 그대는 더 없이 행복해 질것이요」했다.
그러자 인간의 행복을 질투한 악마는 「그러면 나도 제발 한 몫 끼게 해주오」하고 악마는 양과 사자와 원숭이, 돼지를 죽여 그 피를 비료로 그 묘종에 흘러 넣었다. 그러므로 술은 처음 마시기 시작할 때 양처럼 온순하고 조금 더 마시면 사자처럼 강폭해지고 조금더 마시면 원숭이처럼 까불고 허둥대고, 조금 더 마시게 되면 돼지처럼 더러워진다』
이 이야기는 술이란 것은 본시 더 없이 좋은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무절제한 방종 끝에는 더없이 더럽고 추한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는 가르침을 탈무드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 둘: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음주량은 세계 최상위권에 속한다고 한다. 사람사는 법도가 무너져 가는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술을 무절제하게 마시는 것 같다. 로마가 타락해 갈 때 로마 원로원은 술의 축제인 박쿠스 축제를 금지시킬 정도로 술은 그 사회를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기원전 2600년경, 인류 최초의 성문법인 함무라비법전에서도 「양조법」이 특별히 제정 된 것을 보면 술이 인간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가난 짐작이 간다. 경직된 독재사회는 물론이고 무절제한 탐욕으로 병든 사회에서 술의 위력이란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이런 사회에서 술이란 때때로 부정한 음모가 이루어지는 밀실에서 비뚤어진 인간의 양심을 더욱 마비시키는 마약과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될것이다.
■ 셋: 위에서 언급 했듯이 술이란 것은 여러가지 부정적 요소를 지닌것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어디 술뿐인가.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주신 모든 것이 다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손에 그결과는 달려있다.
술이란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술은 기쁨과 만족과 풍요를 가져다 주는 음료이다. 그리고 술은 밝고 맑은 아름다움과 헌거로운 음료이다. 그리고 술은 너그러운 마음과 베품의 향기를 지닌것이며, 감미롭고 신성한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음료이며, 인간의 마음을 더없이 높고, 넓고 밝은 곳으로, 열정적인 생명으로 이끄는 음료이다. 그러기에 모든 제의양식에 술은 고대로부터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사랑과 신의, 회해와 결속의 상징이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인 피를 포도주로 상징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당연한 이치라고 할 것이다. 구약의 시인도 하느님의 영으로 가득찬 삶을 「술기가 가득한 내잔은 아름다워라」라는 말로 표현했다.
■ 넷:『여러분은 우둔한 자들이 아니라 슬기로운 아들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자세히 살피시오. 때를 선용하시오, 시대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게 되지 말고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깨달으시오. 술에 취하지 마시오, 취하면 방탕해 집니다. 오히려 영으로 충만하십시오』(에페5, 15~18)라고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인들에게 말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은 술 그자체에 대한 경각심은 물론, 더 넓은 의미로 양심과 이성을 마비시키는 인간의 온갖 무절제한 탐욕에 취하여 살아서는 안된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시대가 악하니, 때를 선용하라」(에페5, 16)는 것은 이 말씀의 내용을 더욱 뒷받침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 다섯: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인간은 술취한 사람처럼 이성을 잃고 양심을 저버리고 그 무엇에 취하여 살아 갈 수가 있다.
르네상스 시대「피이터 브뤼겔」이란 플랑드르의 화가는「쾌락의 동산」이란 풍자화를 그렸다. 음식이 산더미처럼 쌓인 밥상밑에 기사는 창을 팽개치고, 농부는 도리깨를, 학자는 책을 내팽개치고 땅바닥에 골아 떨어져 있는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풍자화를 통해서 그는 인간이 동물적 욕심과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인간 스스로 모든 자존심을 송두리째 팽개쳐 버리고 물질에 취해버린 상황을 고발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어리석은 자들의 낙원은 지옥보다 더 위험스럽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오늘 우리사회의 몇몇 정치인들과 교육자들의 뇌물사건과 선령한 양민의 재산과 목숨을 앗아간 사이비 종교인들의 사기극을 보면서 저 브뤼겔의「쾌락의 동산」을 떠올리게 됨은 지나친 상상이 아닐것이다.
그러나 그 동산에 사는 사람이 어디 저 물의를 일으킨 사람들 뿐이겠는가, 충분히 여유가 있는 공간에서도 남의 등을 예사로 밀어 붙이고 타인의 예모있는 도움을 받고도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할줄 모르는 사람들, 아주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이웃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고 성장한 것이 오늘 이 시대, 우리들 모습이라면 우리 모두는 술보다 더 독한 그 무엇에 취해 있는 것은 아닐는지,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간에, 남의 몫과 나의 몫에 대한 명확한 구분을 하지 못하고, 「하면 된다」는 폭력적사고가 무리가 없이 통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오랜 군사정권 밑에서 길든 탓일까. 아니면 우리는 그 무엇에 집단적으로 취해 있는 것일까. 거대하고 화려한 물신(物神)의 품에 취해 있던 세계에서 탈출하여 바람에 펄럭이는 장막속에 거처하신 아브라함과 이삭과 요셉의 하느님, 그 하느님을 오늘 우리교회는 어디에 모시고 있는가. 체제와 권위에 순응하지 않을때 철저히 불목하고 대화를 거부하는 교회라면 낙타는 그냥 들이마시면서 티검불은 걷어내는 자들과 우리는 다를바가 무엇이겠는가.
정치인과 사업가들이 골프장에서「물꼬를 트는 일」을 하듯, 우리의 성직자들도 가난한 자들을 외면한 시대적 모순의 현장인 골프장에서 이웃을 위한 사목과 자신의 건강을 염려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영에 취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에페5, 19참조) 십자가 없는 무풍지대에서 부활의 꿈에 취해 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기복신앙으로부터 오는 성직자에 대한 막연한 존경심에 밀려 자신의 직분과 인격을 구분하지 못한채 살아가는 성직자 수도자가 있다면 그들 또한 술에 취한 사람과 다를바가 무엇이겠는가, 참으로「어려운 시대」 (에페5, 16참조)란 바울로의 시대만은 아닌 것 같다. 20대의 고민은 「왜 살아야 하는가」였지만 지금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고 보면 「인간은 노력하는 한 괴로워 한다」는 괴테의 말을 차치 하고라도「악한 시대, 때를 아껴쓰라」는 바울로의 권고대로 내일이 오면 그렇게 되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오늘 이 시간을 외롭더라도 아껴쓰는 지혜만이「우리의 참된 희망」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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