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 50만년이라는 장구한 인류의 삶 가운데 불과 5천년이란 짧은 기간에 인류의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한 이유는 인류가 문자를 발명 한 까닭이라고 본다. 말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인간이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 본다. 하지만 인간이 말과 글로써 표현할 수 있는 한계란 실로 허약하기 이를데 없다고 할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선사시대로부터 춤과 노래, 그림을 통한 상징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교의 모든 상징적 요소을 다 제거해 버린다면 하느님과 인간과의 통교는 불가능하리 만큼 삭막하고 공허하게 될것이다. 상징과 우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종교는 그 어딘가 삭막하고 빈말이 난무하게 된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지하철이나 고속버스 터미널 같은 곳을 지날때마다 세상의 종말과 예수의 재림을, 불꽃 같은 정열로 외치며 전단을 뿌리는 그리스도교적 신흥종교인들을 만나기가 일쑤이다. 이들을 만날때마다 이땅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한사람으로서 가슴이 무거워짐은 유독 필자만의 경험이 아니라고 본다.
▩둘 : 그리스도교적 실존철학가인「키엘케골」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적 본질은 지상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것이지만 평범한 인간에게는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 걸림돌을 의식 않는 사람은 정숙한 주부가 요란한 무희복을 입는 것보다 더 역겹고, 엄격한 재판관이 건달 같은 유행복을 입고 나타나는 것 만큼 끔찍한 일이다.…』
그가 말한「걸림돌」이란 무엇을 두고 한 말일까. 아마도 그것은 인간의 상식적인 논리로써는 감히 다 설명할수 없는 그리스도교의 역설적인 가르침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사실 나자렛 예수의 생애, 그 자체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며, 그분의 가르침은 또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역설이 깔려 있는가. 맹신적이고 광신적인 교리에 입각하여 대화가 단절된 선교나 어설픈 신학적 지식으로 하느님의 신비와 인간 삶의 심오한 비밀을 마치 상인이 그객 앞에서 물건을 골라주듯 가벼운 몸짓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사람은 보석상자속의 보석은 훌훌 털어버리고 상자만을 챙겨 넣는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하느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라는 지혜서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신비앞에 인간이 가져야 할 경외심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라고 여겨진다.
▩셋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입니다. 이빵을 먹는 이는 영원히 살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줄 빵은 곧 내 살로서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는것입니다』(요한6, 48~51).
예수의 이 설교로써 그를 따르던 많은 제자들이 서로수근 거리며 예수를 떠나갔다(요한6,66)고 요한 복음 사가는 보고하고 있다. 나자렛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그분의 사랑과 헌신, 죽음을 통한 희생을 체험하지 못하고 인식적인 사고의 차원에서 그를 바라보았을 때 이 예수의 말씀은 그들이 넘어 설수 없는「걸림돌」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곳 갈릴래아 사람들과 같이 두터운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에게도 이 말씀은 예외없이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말씀을 가리켜 「믿음의 결단」을 내릴수 없을 뿐더러, 거부하는 사람들을 세대를 통하여 꿰뚫어 본 말씀이라고 신학자「요한네스 부어스」는 말하고 있다.
만약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을「성체성사」에 연계된 말씀으로 도식적으로 이해하고 이 말씀의 깊은 뜻을 다 이해했다고 한다면 우리의 믿음도 저 거리의 떠벌이 광신자의 독백과 다를 것이 없을것이다. 중세기 어느 성인은『성체성사의 신비를 우리가 다 알아 듣는다면 우리는 죽고 말것이다』라고 했다. 과연 성체성사의 신비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죽는 날 까지 그 깊고 심오한 현의를 깨달아가는 과정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우리는 고백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의미는 우리가 머리로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인 삶으로서 체득하여 그분안에 거듭 태어나는 신비를 깨달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살아갈때만이 비로소 우리는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고 감히 말할수 있기 때문이다.
▩넷 :『여러분도 물러 가고 싶습니까』하고 예수는 그를 떠나간 많은 제자들 등뒤에서 그의 열 두 제자에게 물으셨다. 이때 베드로는『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물러 가겠습니까? 주님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있으며 또 익히 알고 있습니다』(요한6, 68~69)하고 예수께 고백했다.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은 예수의 말씀을 모두 이해함으로써 얻은 결론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직 그가 그때까지 예수와 함께 살아 왔던 그 사무치는 삶의 체험즉 인간에 대한 예수의 끝없는 연민과 무한한 사랑에서 그는 이성과 논리를 초월하여 신뢰 할수 있는 믿음을 얻은 것이라 해야 할것이다. 즉 무한한 사랑에 대한 신뢰, 그 신뢰로부터 그는 이 깨달음을 얻을수 있었을 것이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이시오(요한14, 1)하신 예수를 통하여 그는 이미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났음을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다섯 :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는 똑 같은 질문을 해 오실 것이다. 우리의 일상에서「예」와 「아니오」라고 결단내려야 할 매 순간마다 예수는 우리 모두에게 묻고 계신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는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고 계신다.
장마철 수렁같이 질펀한 탐욕 속에서 앞을 다투어「나와 우리」라는 개인과 집단의 이기심으로 팽팽히 둘러쳐진 울타리 속에 황금빛 환상의 행복을 쫓아서 서로 밀고 밀리는 아수라장 같은 우리의 삶 그 한가운데서, 그분은「당신도 그들을 따라 가겠소」라고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고 계신다. 「하느님과 맘몬」그 누구를 따라 나설것인가? 나는 끝없는 결단 앞에 선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그 결단의 자유로써 인간은 평화와 행복을,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품위를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비운의 시대, 폐허의 참담한 어둠 속에서 빛의 제단으로 비상하려 했던 시인, 공초 오상순은 이세상을 떠나며「자유가 나를 구속했구나」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의 믿음 앞에서「자유」란 얼마나 간수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선물인가? 생명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서성이는 것이 인간의 자유이지만 우리는 이「자유」로써 하느님의「종」이 아니라「하느님의 자녀」로 초대하는 그분께 응답을 드릴 수 있는 은혜를 받고 있는 것이다. 『노력하는 한 인간은 괴로워한다』고 괴테는 말했지만 진리의 빛이신 하느님은 인간의 힘으로써는 도저히 건널수 없는 그 막막한 삶의 구렁텅이, 그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도, 그분은 바로 우리 곁에 자비로운 아버지로서 큰 팔을 벌리시고 우리를 맞이하고 계신다. 다만 우리의 결단이, 일어나 그분께로 향하는 그 자유로운 결단이 언제나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 걸림돌을 넘어서서 깨달음의 길 앞에 서게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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