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13. 31~33 : 마르4. 30~31 : 루가13. 18~20)
「하느님의 나라」、이 얼마나 강대하고 비할데없이 거창한 나라를 연상케 하는 개념인가. 구약시대 사람들의 하느님 나라 도래에 대한 기대는 자못 컸었다. 통속적으로 소창세기라고 불리던 그들의 외경서「환희서」는 예수 그리스도이전 약 백년경에 하느님나라에 대한 다음과 같은 예언을 읽을 수 있다 : 『주님은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게 나타날 것이며 모든 사람은 나를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 알아보게 될 것이다』고대 그리스인들의 예언서「시빌라서」에서도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을 수 있다 :『그 때에 하느님은 태양에서 한 왕을 보낼 것이며 그는 지상에서 상(祥)스럽지 못한 온갖 전쟁을 그치게 할 것이다』
예수당시에 유대아민족의 지도층이었던 바리사이파사람들은 거대한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에 거는 마지막 희망으로 하느님이 나타나셔서 여봐라는듯이 능력을 휘둘러 하느님나라를 유대아땅에 회복시켜 주시기를 희구하고 있었다 :『우리 하느님、 당신께 바랍니다. 당신의 크신 힘을 나타내소서. 지상의 모든 우상을 짓밟으시고 가짜 신들을 없애주소서』이러한 염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리면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예고를 할 때에『그 아기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며… 야곱의 후손을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이며、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하느님 나라 관념에 젖어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의 출현은 너무나 실망스러웠던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모두 떨쳐 일어나라고 하지 않고 회개하라고 외쳤고、하느님나라의 역군들을 무식쟁이 어부、비천한 세리 중에서 뽑아 거느리고 다녔고 하느님 나라는 가난한 사람、우는 사람、쫓기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설파하고 다니는 예수의 모습은 얼핏 만화처럼 보였을 것이다. 제자들도『주님의 나라는 언제 이루어집니까』하고 물었을 정도였다. 예수는 그들에게 분명히 하나의 걸림돌이었다.
하느님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고 누룩에 비유하여 설명한 것은 예수께서 이들 제자들만큼은 이 걸림돌에 걸려넘어가지 않게 하시려는 배려였고 그들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시려는 것이었다.
사람의 힘과 그 노력의 성사에는 간격이 있다. 성취하려는 성사가 하느님의 일이라면 그 간격은 엄청난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부족한 힘을 보완해 주는 성령을 보내실 작정이지만 성령의 힘을 받기에 앞서 먼저 알아들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하느님나라는 시소종대(始小終大)의 자질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작은 미미하고 보잘것 없는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그 결말은 놀랍도록 위대한 것이라는 교설이다. 이 묘리를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로 적절하게 설명하신 것이다.
겨자씨는 팔레스티나 성지에서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앗으로 통한다. 크기는 핀침대가리 만큼의 크기이다. 그 씨는 너무나 작아서 사람들이 관심조차 두지 않으며 어떻게 생겼는지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큰 나무 중에 느티나무가 있는데 그것을 쳐다보고 감탄하지만 그 씨앗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보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씨앗이 너무 작고 미미하기 때문이다. 결과가 크면 클수록 그 시작에는 눈길이 가지 않는 법이다. 하느님나라는 이와 같은 이치에서 이루어진다.
하느님 나라가 자라는 모습은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는 것과 비겨 말할 수 있고 한줌 누룩이 서말 밀가루반죽을 부풀게 하여 집안식구들이 배불러 먹을 수 있는 식량이 되는데 비겨 생각할 수 있다.
겨자씨는 뿌려져서 보통 2미터크기의 나무로 자란다. 겨자나무는 식량을 공급하는데 초점이 주어진 것이 아니고 공중의 온갖 새들이 깃들일 수 있게 하는 푸르름을 제공하여 안식처가 된다는데 초점이 모아져 있다. 우리나라처럼 느티나무와 같은 거목이 제공하는 푸르름이나 서양의 마로니에 나무같은 울창한 나무에 비하면 2미터정도의 겨자나무는 별볼일 없는 나무이지만 겨자나무는 그 성장력에 있어서 다른 나무에 비할 데가 못된다. 특히 나무가 부족한 팔레스티나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어떤 성서학자는 겨자나무를 실제로 경험하려고 자기 정원에 몇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2년 후에 너무나 자라고 퍼져서 결국 베어버렸다고 한다. 겨자나무라 하지만 초본식물에 속하여 대단스러운 나무는 아니나 이 비유에 인용된 것은 작은 씨앗과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든다는데 중점이 주어져 있다. 그것은 구약성서의 예언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야훼께서 말씀하시지를 :『내가 송백 끝에 돋은 연한 햇순을 따서 높고 우뚝선 산위에 몸소 심으리라.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그것을 심으면 햇가지가 나서 훌륭한 송백이 되리니. 온갖 새들이 거기에 깃들이며 온갖 짐승들이 가지 그늘에 쉬게 되리라』(에제 17. 22이하)고 한 예언이다.
이 안식처 나무는 고대인들의 우주나무의 영상이며 풍요로운 생명력과 왕성한 성장력의 상징으로 생각하던 나무이다. 예수께서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는 그 시작은 보잘 것 없지만 그 자체가 가진 하느님의 생명력으로 계속 자랄 것이며 왕성한 추진력으로 역사 속에 뿌리박고 모든 이에게 안식처를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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