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지난 8월 19일 모스크바에 진군한 쿠데타군의 탱크 위에 올라 선 러시아공화국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쿠데타세력에 끝까지 저항 할 것을 국민들에게 호소하면서 『여러분은 속지마십시오』라고 외쳤다. 배고픈 짐승이 덫에 걸려들기 쉽듯이 물질적인 궁핍 앞에선 인간도 자신이 고수해야 할 존엄한 가치를 쉽게 내동댕이칠 가능성이 많다. 옐친과 그를 지지하는 민주세력은 목숨을 걸고 자신의 양심을 따라 진리 앞에 자신의 거취를 분명히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옐친은「진실한 한마디 말의 무게가 이 세상 보다 더 무겁다」라는 러시아속담을 역사적 현실로 바꾸어 놓은 인물이 되었다.
오늘날 공산주의체제를 와해시키고 탈냉전시대의 막을 올린 이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것을 페레스트로이카(新思考) 혁명의 기수, 미하일 고르바쵸프와 그를 지지하는 혁신파의 공적만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오늘날의 이 혁명적 변화를 가르켜 종교적 혁명이라고 보는 일부 견해에 필자는 더욱 공감한다. 공산치하에서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인간해방과 구원을 위해 고난을 겪고 목숨을 바쳐 투쟁해왔다. 그 구체적 예로써 동독의 라이프찌히의 니콜라이 교회를 들 수가 있겠다. 당시 서독에서 수학중이던 필자는 독일통일을 앞둔 한달전에 그곳을 방문하여 손가락하나 다치는 일 없이 평화적으로 철권 같은 독재자「호네카 정권」을 무너뜨리고 통일독일의 기반을 닦는 것이「라이프찌히 교회운동」이라는 것을 확인 할수 있었다. 수십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된 그들의 기도와 희생은 어둠속에 뿌려진 밀씨가 자라나 수백배의 결실을 맺듯이 인간의 기대와 상상을 초월하여 역사속에 이룩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 둘: 부정과 부패로 집단적 이기심에 빠져 온갖 음모와 속임수로써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민중을 착취하고 학대하는 독재국가에서 오늘도 이를 항거하여 자유와 평등, 평화를 부르짖는 수많은 그리스도교적 민주인사들이 이 세계 도처에 존재하고 있다. 이들은 독재자들로부터 때때로 옥에 갖히고, 갖은 모욕과 수난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구체적 억압세력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교회내부에 이른바「경건한 전통주의자들」로부터 오는 압력이라고 할 수 있다.
제도와 체제, 체면과 이권으로 권력에 아부하고 타협하면서 빌붙어 살아온, 편협하고 옹졸한 고집으로 신앙심이 깊어진 경건한 전통주의자들은 오늘 우리주변에도 존재하고 예수시대에도 존재했었다.
나자렛 예수가 그 생애를 통해서 가장 경계했던 인물들이 바로 이러한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이었다. 예수의 마음을 끝없는 슬픔과 분노로 뒤흔들어 놓았던자들은 천하에 드러난 죄인도 독재자도 아닌 바로 도덕적으로 완벽하고, 신앙이 돈독한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이었다는 이 역설적 사실은 그리스도교적 신앙에 중요한 의미을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교적 경건함이란 역사적 현장과 인간의 구체적 실존상황으로부터의 단절과 성별(聖別)로 하느님 앞에 자신의 결백함과 순결함을 주장하는 나르시스적 도취가 아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 깨끗하고 흠없는 경건심이란 고아와 과부들이 괴로움을 당할 때 찾아보며 세속에 물들지 않게 자기를 지키는 것』(야고1, 27)이라고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교적 경건성」을 정의하고 있다.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변호하고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는 의(義)로운 삶을 살면서도 자신의 의로움과 경건함을 하느님 앞에 주장하기 보다는 오히려 겸손되이 하느님의 자비와 의로움에 자신을 맡기는 행위를 바울로사도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셋: 마르코 복음 7장 1절부터 23절에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이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예수의 새로운 해석에 전면적인 도전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에 따라 걷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빵을 먹습니까?』(마르7, 5)하고 그들은 예수께 질문한다. 이들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간단하고 명쾌하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도다. 헛되이 나를 흠숭하나니…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마르7, 6~7참조)라고 예수는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님(마르코2, 27)을 분명히 한 예수는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무시한 모든 관례법, 즉 인간의 삶을 속박하는 제의적인 법규와 이에 따른 기계적인 의무준수를 철저히 배격했다.
예수는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의 자기정당화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 하느님 앞에서 인격적인 책임과 자신의 양심에 대한 성숙한 판단에 신뢰한 인격적 책임을 동시에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은 결정적으로 새로운 윤리관이었다고 할 것이다. 즉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인간의 행위」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서의 태도, 즉 하느님 앞에서의 그의「존재」가 더 중요한 것임을 가리킨다고 할 것이다. 인간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하느님앞에서 공로를 내세울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사랑과 구원의 모든 근원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넷:「형식과 내용」에 따른 갈등은 물론「순결함과 불결함」에 대한 경건성을 두고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대립과 갈등이 도처에 깔려 있다고 본다. 그러나『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마르7, 15)라고 한 예수의 말씀대로 외적인 규범이나 전통으로서의 윤리적이고 제의적인 형식적해석이 우선 될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내 마음의 중심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 어느 시대에도 예외는 없었지만 특별히 우리가 사는 이시대를 암울한 시대, 혼란과 혼돈으로 희망 보다는 절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시대라고 가정한다면 우리 교회는 하느님과 역사앞에 자신의 입장을 변명하고 주장하면서「경건함과 순결함」으로 전통고수에 골몰하던가 아니면 교회가 관례법적 외적인 동기를 지닌「거짓 경건성」의 위험성을 주시하면서 자기시대의 이웃에 대한 다함 없는 책임을 지고 하느님 앞에 겸손된 자기투신을 하던가 결국은 그 어느 하나의 길을 선택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도움이 꼭 필요한 곳에서는 도와주어라. 안식일에라도 선을 행하여야 한다. 안식일 계명에 묶여서 꼭 필요한 일을 못해서는 안 된다』는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고 행동에 옮길수 있을 때 비로소 그는 사랑 앞에서「자유」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고, 사랑의 의무를 이행하는 데에는 어떠한 한계도 있을 수 없음(마르5, 38참조)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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