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 길고 지루했던 여름은 다시 무한한 세월의 흐름속으로 그 자취를 감추고 있다. 잔인하리만큼 뜨거웠던 태양의 열기와 죽음을 몰고 온 폭우가 휩쓸고 간 고단한 우리들의 삶, 그 빈자리마다 서늘한 눈빛으로 가을이 찾아 오고 있다. 창을 열고 바라보는 도심의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고 푸르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결실을 위해 눈부신 햇살 아래, 투명한 눈빛으로 마지막 시간을 참으로 소중히 다스리고 있다.
지축을 흔들던 거리의 소음도 지금은 더 먼 곳에서 마치 멀고 먼 지평에서 울려오는 짐승의 신음소리처럼 아득하다.
■ 둘: 삭막한 도시, 숨막히는 공해 속에서도 그 어디선가 용케도 살아, 생명을 부지해온 풀벌레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무한으로 열린 이세계, 그 어느곳을 향해 저토록 끝없이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삶」이라는 무한한 신비의 바다, 그 아무도 살아 생전에는 완전히 해독할 수 없는 무한한 암호의 바다에 저 미물들의 울음소리는 또 하나의 시내가 되어 흘러 들고있다. 가을은 겸허한 생명의 신비 속에 열린 축복의 계절이 아닐수 없다.
밝고 투명한 햇살 아래 모든 사물은 더욱 가까이 보이게 마련이지만 저 조용한 황금빛 햇살로 하늘은 더욱더 멀어지고, 귓가에 끝없이 엄습해 오던 소음마저도 아득한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까닭은 무엇인가. 더욱 더 하나 되는 만남을 위해 우리는 때때로 절벽 같은 고독의 벼랑 끝에서-그 언젠가 하나될 바다를 향해 갈라지는 강과 같이 서로 멀리 멀리 헤어져야만 하고, 더 높고 빛나는 영원한 희망을 위해 우리는 때때로 절망같이 먼 기다림 앞에 참으로 오래고 긴세월을 인내로써 외로운 선택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눈부신 계절, 가을은 겸허한 마음으로 우리가 눈과 귀를 열도록 자비로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주신 「깨달음의 계절」이 아닐까!
■ 셋: 며칠전 필자는 어느 모임에서 고백성사를 준 적이 있다. 그곳에 온 대부분 사람들은 평생토록 자기자신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내놓은 분들이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아 버려진 아이들과 노인들, 불구의 몸으로 태어나 그 누군가의 도움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심신 장애자들, 그들 중에는 한번도 아기를 낳아 보지 못한 처녀가 손과 발이 뒤틀린 어린 아기를 품에 안고 우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 재치는 일을 하고 있는 분도 있었다. 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들은 누군가의 나눔이 필요한 이웃에 책임을 느끼고 남의 십자가를 내 어깨에 얹고 살아 가고자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죄는 무엇이었을까-이들의 죄는 하나같이 예수님처럼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그렇지가 못한 것이 하느님께 죄송하다는 내용이었다.
결손 가정에는 외톨이가 된 어린소녀들을 모아 함께 살고 계신 어느 나이어린 수녀님의 눈물어린 고백도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고백을 듣는 사제로서, 나는 내가 사제인 것을 참으로 이때만큼 부끄럽게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들이 보고자하는 것과 듣고자하는 것, 그리고 말하고자 하는 세계와 지금 저 시점에서 무서운 이권으로 서로 얽힌 이들의 「보고, 듣고, 말하고자」하는 것과는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 것일까』하고 생각하니 세상에 살고 있음이 문득 하나의 작은 환상과 실재 사이에 두 발을 놓고 사는 어느 동화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 넷: 나자렛 예수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예수로부터 「빵과 건강, 자유」를 구했다. 예수는 이러한 그들의 요구를 물리치지 않으셨지만 그의 궁극적 목적은 언제나 「영원한 가치」에 대하여 그들이 「마음의 눈과 귀」를 뜨도록 그들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귀먹은 반벙어리의 치유」(마르 7, 31이하)에 대한 기적 이야기에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이러한 그의 가르침이 시사되고 있다.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더욱 생생하게 보고하고 있는 마르코 복음사가는 극히 짧은 보고를 통해서 나자렛 예수, 그분이 바로 예언자 「이사야」가 예언했던 그 메시아(이사 35, 5)이심을 고백하도록 한다.
「막혔던 귀가 열리고, 닫혔던 눈이 열린」(마르 8, 22) 예수의 기적과 이 기적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목적하신 그 사명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분은 모든 일을 좋게 하셨구나, 저 귀머거리들은 듣게 하시고 저 벙어리들은 말을 하게 하셨구나』하였다(마르7, 37).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를 지켜본 군중의 입을 통하여 예수가 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실 메시아이심을 고백하도록 했다.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거친 다음에야 완전히 이해될 「예수의 메시아성」은 이제 감추면 감출수록 침묵하면 침묵할수록 더욱 고조되어 마침내 전격적인「베드로의 고백」(마르8, 27)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음을 우리는 알수 있다.
■ 다섯:『에페타』즉『열려라』하신 위엄과 권위에 찬 예수의 조용한 한마디 말씀으로 그 병자는 듣게 되었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열려라』하신 예수의 명령은 그의 귀를 열었고 그의 삶 전체를 열어놓았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의 표지」가 아닐수 없다. 세상의 온갖 부질없는 욕심, 인간의 모든 아집과 고집, 계급과 인종, 혈통, 돈과 명예, 깨달음이 없는 모든 지식…. 그 모든 물질적인 이기주의로부터「막혀버린 귀」와「진리앞에 바른 말을 하지 못하는 반벙어리」와 같은 모든 인간에게 그분은 오늘도 끝없이 외치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 이런 까닭에 우리가 참으로 그분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신앙의 징표는 「이사야」가 말한 메시아시대의 특징이 드러날 때만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세상의 울부짖는 목소리」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들을 수 있는 귀」를 지닐 때만이 우리 교회는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멀어지면 멀어 질수록, 숨으면 숨을 수록 더 우리 내면의 눈과 귀에 선명히 드러나는 이 투명한 계절의 문앞에서 나는 아직도 「귀먹은 반벙어리」같은 나를 바라 보며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이 단 한 순간만이라도 자기 자신을 온전히 놓아 둘 수만 있다면 그는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을텐데… 』라고 탄식한 중세 독일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말을 오늘은 풀벌레 울음소리가 더욱 깊어져가는 가을저녁, 창에 기대어 다시 조용히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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