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튼 유대아인들에게 비쳐진 예수의 전도행각은 기적을 많이 행하는 자로 비쳐졌다. 예수의 진가를 모르는 그들에게는 그 많은 기적은 관심거리가 아닐수 없었으며 찬반양론의 의견으로 여론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에게 모아지는 여론은 관헌들을 긴장시킨다. 여론을 주도하던 바라사이파 사람들은 바짝 긴장하였다. 당시 사회를 주도하던 2대 당파로서 사두가이파가 있었다. 그들은 바리사리파 사람들과는 적대관계에 있었지만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는듯한 예수의 가르침 때문에 예수께 대한 반감은 바리사이파 사람들 못지않았다. 그들은 대제관사독(사무 하 8, 17)의 후예로서 대대로 제관계급을 이루고 있었다.
이 두 계층이 합의하면 못 하는 일이 없었다. 이들은 예수께 대한 여론이 들끓는 것을 보고 그들의 졸개들을 보내어 예수를 잡아 오라고 명하였다. 신변의 위험을 알고 계시는지 모르고 계시는지 예수의 태도는 이에 별로 신경을 쓰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하실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당신을 체포하려는 당국의 음모에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있음을 뜻한다. 그 이유는 예수의 수난은 하느님의 구세사에서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며 그 수난이 시기는 인간들의 조작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느님이 정하신 때에 이루어 진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때가 올 때까지 못다한 선교사업을 완수해야한다. (요한 9, 4:11.9~10)이 사업을 완수했을 때 그때가 예수의 운명의 때이며 이때는 유대아인들의 결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예수의 순명에 의해서 이루어 질것이다.
그것은 전장에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께서 사람들의 고향에서 온 분이 아니고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그분께로 다시 돌아 갈 준비를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얼마동안은 너희와 같이 있겠지만 결국 나를보내신 분에게 돌아가야 한다』「내가 너희와 같이 있을 잠시 동안」과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때의 대조는 사람들에게 결단을 재촉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예수께서는 지금 이 말씀을 유대아인들에게 하고 계시다. 그들은 이동안 예수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가 아직 그들사이에 임재해 있는 동안 그 지혜를 받아 들여야 할 절박한 때이다. 그들의 생각에 따라 하느님의 나라를 꾸려나가려는 옹고집을 버리고 그들 눈앞에 있는 하느님의 지혜를 빨리 알아 차려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같이 있을 잠깐동안에 결단을 촉구하는, 같은 말씀을 오늘 처음 시작하여 앞으로 여러 번 제자들에게 되풀이 할 것이다. 이 결정적 위기의 순간을 요한복음서에서 강조하여 되풀이 한다(12, 35: 13, 33: 14, 19: 16, 16). 그것은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께서 지금 처해있는 수난과 죽음을 앞둔 위기의 순간과 요한이 이 복음서를 쓸때의 박해받은 교회의 처지가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찾고, 그의 말씀을 듣고 그를 따르는 일은 복음서가 제시한 생사가 달린 중요한 테마이다.
그것은 사람이 길을 찾고 진리를 찾고 생명을 찾는 것이며 그 말씀을 듣는 모습은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예수와 그 말씀을 듣는 군중의 모습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군중과 제자들의 모습은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가는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수를 찾을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중요한 때에 유대아인들은 두 가지 분류로 나뉘어 예수를 찾아 다녔다. 하나는 그에게서 생명의 말씀을 들으려고 찾아 다녔고 한 부류는 그를 잡아 죽이려고 찾아 다녔다. 어떻든 간에 때가 늦으면 그분을 찾아다녀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있는 곳에 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평범하고 쉬운 말은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신원을 표한하는 중요한 또 하나의 말마디이다. 「에고에이미」라는 말로 유명한성서 그리스어는 모세가 하느님께「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말에 하느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이고 그후 성서세계에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통용되었다. 「나는 있다」(출애3, 14)이것이 내 이름이다라는 것이 하느님의 이름이라고 계시하신 말씀이다.
그 후 『나는 야훼, 너희 의 하느님이다』라는 계시가 계속되었고 이 하느님의 이름은 예수께서『나는 생명의 빵이다, 세상의 빛이다, 착한 목자이다, 부활이요 생명이다. 길이요 진리이요, 생명이다』라고 단언하면서 당신의 신원이 모세가 듣던 하느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그 분이라는 것을 가르치셨다.
『내가 있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고 하실 때 예수님은 당신의 신성을 계시하였고 유대아인들은 엉뚱하게 알아 들었다. 그들은 예수가 자기들을 피하여 이방인들의 나라고 가겠다는 말로 오해하였다.
이 말은 요한의 독특한 풍자로서 사실상 유대아본토에서 개척받은 예수의 이르침은 이방인들의 땅에서 열렬히 환영받았다는 사실을 말한다. (사도 10, 4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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