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 몇해전 나는 독일 ZDF에서 방영된 주말 명화감상을 통해서 한편의 흑백영화를 감명깊게 보았다. 그 영화 제목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죽음의 수용소라고 불리우는 나치수용소에서 마지막으로 살아 남은 한 유태인이 자기 자신과 동료들에게 인간으로서 차마 할수 없는 온갖 악한 짓을 다하고 죽은 어느 나치병사의 고향을 방문한다. 「도대체 그 인간은 어떤 배경을 지녔기에 그토록 악할 수가 있을까?」하는 것이 그의 방문 목적이었다. 온갖 회한과 분노로 엇갈리는 심정을 가누며 그 병사의 부모를 찾아갔을 때 주인공은 또 다른 하나의 충격으로 말을 잃고 돌아선다.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그 병사의 노부모는 더 없이 착하고 어진 시골 농부였으며, 그 노부부의 안방에 걸려 있는 사진, 환한 웃음으로 눈빛이 유난히 유순한 한 청년이 바로 그 악한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 둘:「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라는 로마 격언과도 같이 한 인간이 거대한 악의 조직속에 존재할 때 악마는 인간에게 「익명」이라는 무서운 탈을 선사하는 것이 아닐까. 불과 얼마전 온통 세상을 경악케했던「곰 쓸개」에 얽힌 그 무자비한 사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문ㆍ라디오ㆍTV 할것없이 온 세상이 떠들썩 했어도 정작 살아 있는 곰 쓸개를 빨아먹었던 사람들의 얼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우리들의 도시 한 가운데, 어쩌면 바로 우리 곁에 철저히 익명으로 숨어있는 것이 아닐까.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사회,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사회일수록 이러한「익명성」은 더욱 더 깊고 은밀한 독처럼 자연과 인간의 생명과 삶을 병들게 한다고 본다.
■ 셋: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라면 그 어느 종교이건 이러한 인간의 야뉴스적인 두 얼굴, 그 탈을 벗을 때 인간은 자유롭게 되고 구원과 해탈이 가능하게 된다고 가르친다. 고대로부터 진리를 환한 횃불에 비유한 것은 그 어느 곳에서 바라 보아도 안팎으로 가득히 빛나는 그「드러남의 충만함」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구체적인 삶속에 드러나지 않는 진리는 생명이 없는 이론이거나 속과 겉이 다른 속임수 일 가능성이 많다. 진리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교적 신앙고백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님을 바오로 사도는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구체적 삶과 유리된 믿음, 때와 장소에 따라 편리한대로 그얼굴 빛을 달리하는 기회주의적인 믿음은 인간에게 종교적, 심리적인 위안을 줄수 있지만 그리스도교적 신아과는 참으로 거리가 먼 것임을 사도 바오로는「소용없는 믿음」「죽은 믿음」(야고2, 14~18)이라고 했다.
■ 넷:「오직 믿음으로써만 구원 받는다」라는 개신교의 신학을 잘못 이해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교적 구원이 핵심을 잃고 마는 결과를 초래 할 것이다. 예수가 말한 인간의 구원조건은「너는 무엇을 믿었느냐」「너는 누구를 믿었느냐」가 아니라「너는 무엇을 하였느냐」즉 「너는 어떻게 살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너는 헐벗고 굶주리고 버림받고 천대받는, 가난하고 병들고 갇혀 있는 너희 이웃들을 어떻게 대했느냐, 너는 그들을 네 형제로 알아보고 그들과 함께 네삶을 나누었느냐」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구원의 조건이다』(마태 25, 31~46 참조)라고 예수는 말씀하셨다.
■ 다섯: 이러한 맥락에서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마르8, 27 이하)을 통해 마르코 사가는 예수의 제자들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를 예수와 그 제자들 사이의 갈등과 긴창의 극적인 묘사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제자들을 향해『「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예수의 질문에 베드로는 이들을 대표하여「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했다』(마르8, 27~29참조). 베드로의 이 고백은 참으로 엄청난 고백이 아닐 수 없다. 눈에 보이는 한인간을 향하여「당신은 하느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반응은 비장하리만큼 엄숙했고 의연했다. 「아직 때가 이르므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마르8, 30참조). 그리고 예수는 미구에 다가올 자신의 받아야 할 수난과 죽음, 그리고 영광의 부활에 대하여 언급하신다. 예수의 이 말씀은 그의 제자들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실망과 좌절 낙담을 안겨다 주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힘과 권력으로 군림해올 민족적인 정치적 메시아를 그들은 기대했고, 이 기회를 통해 그들 자신도 언젠가는 서러운 삶을 딛고 한번은 일어서 보리라는 기대에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급기야 예수를 붙들고 만류하다 못해 항의하면서 그래서는 안된다고 애원했다. 그러나 예수는『「썩 물러가라, 사탄아!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의 일만 생각하는구나」하셨다』(마르8, 33).
■ 여섯: 예수와 그의 제자 베드로 사이의 이 갈등은 2천년 교회역사는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갈등이 아닐수 없다. 「진리 앞에서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처럼 골고타를 향할 것인가, 아니면 십자가를 피해 이권과 권력과 결탁하여 안정을 찾을 것인가」하는 이 믿음의 결단을 가르켜 구약의 예언자는「나는 오늘 그대 앞에 삶과 죽음을 내 놓았다」라고 표현했다. 사탄을 물리치듯 단호한 결단이 없다면 어쩌면 인간에게 옳바른 결단이란 불가능 할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말하고 있다. 세속의 이권에 얽매여 이 세상에서의 번영과 발전을 구가 했던 교회와 수도회는 예외없이 역사 속에 폐허가 되었거나 박제된 유물로서 박물관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마르8, 34)고 예수는 말씀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 세속적인 욕심으로 자기 중심적인 삶으로써 자신의 안락과 쾌락만을 위해 사는 인간이라면 자기의 이웃을 도구화시키는 인간이 될것이다. 그러한 인간에게 이웃이란 언제나 그에게 타인이 될 것이요, 그「타인은 곧 지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은 끝없는 불안과 불만속에서 마침내 죽음이라는 불청객 앞에서 파산될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비록 그가 익명으로 만나는 낯선 사람일지라도 하느님 안에서 사랑과 우애의 연대성을 지니고 만나려고 한다면 저 차갑고 살벌한「얼굴없는 도시」한가운데서도「나의 이웃은 지옥」이 아니라 「나의 이웃은 천국」이라고 감히 말할수 있지 않을까. 「뜬눈에 코 베어 가는 세상」이지만 위협과 갈등 속에서도「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1고린13, 8)라고 노래한 사도바울로와 같이 온갖 두려움과 의심의 고리가 영원히 끊어질「그 때를 믿고 기다리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삶이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되고 있을 때「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신 예수의 질문 앞에서 우리는 비로서「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고백 할수있을 것이다.
그분은 오늘도「익명의 도시」한가운데, 뭇사람들의 시선 밖으로 밀려나 외롭게 걸으면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 오실것이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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