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회사에 대한 역사 기술의 왜곡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더우기 비그리스도교 국가인 한국에서의 그것은 정도가 지나치기까지 하다. 다행히 최근 교회안에서 이를 바로 잡아보려는 일련의 노력들이 행해지고 있다. 지난 3월 한국사목연구소가 펴낸 가톨릭교과교육자료집 「세계사」편이 그 첫 시도이고, 앞으로 「한국사」「사회」편도 속속 간행될 예정이다. 이번에 간행된 「세계사」편과 교회내 교회사 관련저서를 중심으로 현행 우리나라 중·고·대학 교재에 실린 가톨릭교회에 대한 왜곡부분을 비교 분석한다. <편집자 주>
가톨릭 교회가 정신적인 지주였던 서양 중세사회는 암흑시대이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천동설을 주장한 반면 그에 반대되는 지동설은 억압하는 등 과학기술 문명의 발전을 저해했다. 교회는 면죄부 판매 및 성직자의 타락 등 너무 부패했기 때문에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한 것이다….』
이는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의 중ㆍ고교 세계사 교과서와 대학에서 세계사 또는 문화사 교재로 사용되고 있는 각종 저서 및 일반서적에서 중세와 소위 종교개혁 시대의 가틀릭교회 관련부분을 기술하는데 흔히 사용되고 있는 상투적인 내용들이다.
이같은 내용들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나 많은 부분에서 왜곡 기술되었다는 것이 20세기 후반들어 전세계학계에서 설득력있게 거론되고 있고 상당 부분 수정작업이 이루어 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태까지 왜곡부분이 비판없이 거의 그대로 수용됐고 이로 인해 일반 국민들 뿐 아니라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도 이를 당연시 하고 있다.
다행히 근년들어 세계사를 가르치고 있는 일부 가톨릭 신자 교사들이 왜곡부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에 이르렀고 이를 수렴한 가톨릭교육재단협의회(회장·이문희 대주교)의 의뢰를 받은 한국사목연구소(소장ㆍ정은규 신부)가 최근 왜곡부분에 대한 교사용 교육자료잡을 내놓고 있어 그 시정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이 자료자도 지적하고 있듯이 한국에서 왜곡되고 있는 주된 이유는 가톨릭교회의 기초 사료들을 등한히 한 채 개신교적 사관이 크게 반영된 독일과 미국 계통의 역사학자들의 저서와 이를 도입한 일본사가들의 저서들을 한국의사가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데서 비롯되고 있다.
가장 왜곡이 심한 부분은 그들이 말하는 종교개혁에 관한 것이고 그 밖에 가톨릭교회가 중심이 된 중세문화의 긍정적인 요소가 축소 기술되고 있는 점、 중세 당시 일부 부패한 교회의 모습을 과대 포장한 사실、 「갈릴레오 사건」등 교회가 과학기술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식의 서술、그리고 동방교회의 이교(離敎) 원인 종교재판 등이 많은 부분 왜곡 기술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종교 개혁」이라는 것
이에 관해 중·고교 교과서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교황 레오 10세가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의 건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독일에서 면죄부를 판매하였는데 이에 대해 마르틴 루터가 1517년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발단이 됐다. 루터는 면죄부의 효력뿐만 아니라 교황권과 수도원제도를 부정하였고 신앙의 근본은 교회에서 오지않고 성서에 있으며 선행을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다고 설교했다. 이에 대해 교황은 루터를 파문했고 루터는 이에 맞섰다』(한국 교육개발원 저중학교 사회3 10쪽、 박성수 김영하 공저 고등학교 세계사 1백44쪽 등).
이른바 종교개혁 경과 및 결과에 대해서 이들 교과서들은 가톨릭과 루터파가 갈리어 싸우다가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회의」로 제후와 도시에 종교선택권이 주어졌으며、 이후 칼빈과 영국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가톨릭교회 내부에서도 반성을 토대로 한 종교개혁(이른바 반동 종교개혁)이 일어났다고 비슷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를 도식적으로 요약하면 중세 가톨릭교회의 타락과 부패→루터의 종교개혁→신·구파간 전쟁 →신·구파 분리→가톨릭 교회 내부 쇄신 등으로 이어진다.
이들 교과서들은 종교개혁에 관해 3~4쪽의 분량을 할해아고 있다. 지면의 제약과 전반적인 지식수준이 얕은 중·고생을 대상으로 씌어졌기 때문에 종교개혁의 원인과 관련한 정치ㆍ경제ㆍ사회적 배경 등 자세한 부분까지 언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교과서들이 「대사」(大赦=Indulgence)를 면죄부(免罪符)로 오역한 점과 루터나 칼빈이 주장한 교의와 교히(예컨대 「신앙만으로 구원」등)는 충실히 소개하면서 상대인 가톨릭의 그것은 소개하지 않아 형평에 어긋나고 있는 점、 그리고 전체적으로 볼 때 종교개혁으로 인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통일성의 붕괴가 타당하다는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어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술이 되고 있지만 못하다는 지적이다.
한편 중고교 역사와 교사들을 길러내고 그 교과서들을 저술한 우리나라 대학의 사학과 교수들의 각종 저작들은 종교혁명에 관해 사회ㆍ정치적 및 교회ㆍ신학적 배경 등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나 한국사목연구소가 펴낸 가톨릭교과교육 자료집「세계사」편과는 적지않은 시각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고교 교과서들의 확대판으로 볼 수 있는 이 교재들은 대부분 개신교적인 시각에서 쓰여졌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대사교리를 전혀 언급하지않고 「면죄부」로 치부하는 것 부터 그러하고、 당시 가톨릭교회의 일부 성직자와 제도의 부패상을 전체적인 것인양 가대 기술한 점、 루터를 교회의 권위를 부수는 시대의 영웅인 것 처럼 수식하는 묘사방식、 그리고 가톨릭 사관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개혁의 대상인 일부 타락한 성직자와 수도원 및 교회의 잘못된 제도운영에 루터는 타켓을 두지 않고 교의 등 신앙의 핵심부분을 교치려한 점을 「종교개혁」이라며 긍정일변도로 파악한 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조좌호 저 「세계문화사」(87년 박영사)의 경우 종교혁명의 원인과 배경 설명에 있어 당시 유럽사회의 국민국가 태동 및 가톨릭교회 성직자와 제도상의 폐단、 그리고 교회내부게혁의 시도 등 정치ㆍ경제ㆍ사회ㆍ교회적으로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는 한편 결과에 있어서는 종교개혁이 신앙의 자유보다 구속을 가져왔다는 점、 개신교로 인한 교육과 예술의 전반적인 침체、 그리고 교파분열과 투쟁의 폐단 등 부정적인 측면도 아울러 설명하고 있으나、 「교회와 수도원의 농민착취」「중세 가톨릭교회는 의식이 복잡해진 반면 신앙 그 자체는 형식적이고 내용도 공허한것으로…」「교황의 성상·성물을 사치비 충당을 위해 저당 잡히고…」「독일에 대한 교황의 착취가 심하고」「레오 10세가 성베드로 사원의 수축비를 짜내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며」등 극히 편파적인 표현이 적지않게 나타나고 있다.
당시의 교회가 적지않은 부분에서 세속화하고 타락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또 그때의 유럽사회는 국민국가·자유도시 등의 정치적 문제가 첨예하게 등장할 무렵이었는데 교회는 종교혁명을 종교적인 면으로만 대응하고 말았다.
또한 교회는 종교혁명 이전에 개인주의가 지식인들에게 침투하고 있었는데도 오직 공동체 의식만을 강조、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고 스스로의 개혁을 선행하지 못했다.
이같은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 루터에 도움이 됐고 결과적으로 교회가 대분열되는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가톨릭교과교육자료집은 중세의 가톨릭교회를 「당시 유럽인들의 정신적 지주」라고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그리스도교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서양중세를 알 수 없을 만큼 가톨릭교회가 중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란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중세를、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5세기경부터 14~15세기 까지 약 1천년으로 잡을 때 중세 시작당시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야만족、 게르만인을 교회가 문화인으로 교회를 시켰으며、 이후 형성된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유럽세계는 호마교황의 절대적인 지원하에 발전하였다. 한편 군웅할거 봉건영주시대의 각 지역을 교회만이 정신적으로 통일할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이슬림 세력으로 부터 서유럽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교회는 또 일종의 초국가형태를 띠면서 국제사회의 조정 역할도 수행하였다. 교황은 신자들이 제왕이나 제후들사이에 일어나는 항쟁의 조정을 호소하는 최고 법정이 되었고 심지어 제왕을 즉위 또는 폐위시키는 역할까지 했다.
수도원은 자체 정화단계를 거치면서 기도와 명상생활·학문연구·빈민구제·사회교화에 앞장섰다. 또 노동의 신성성을 고취시키고 수공업을 통한 중세 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 했다.
당시의 정신적 활동가들은 대부분 성직자들이었고 이들은 왕국에서 사무를 담당하였다. 교회는 대학도 세워 학문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세웠다.
그러던중 중세 후반기에 들어오면서 특히 십자군운동 후반기의 실패로 로마교황의 위신이 추락하고 종교적 정열도 감소됐으며 상업의 발전과 더불어 세속적인 욕망이 일어나 교회의 종래의 권위와 세속 군주간의 대립이 일어났다. 이른바 정교(政敎)의 충돌이 일어난 시대조류인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정교의 분리와 세속권의 우위시대로 변질되기도 했다. 이 와중에서 세속 군주가 임명한 일부 성직자와 그 추대로 이루어진 일부 교황의 타락도 생기는 등 교회의 어두운 면도 잉태했다.
그러나 교회의 이같은 엄청난 기여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교과서 및 교재들은 「중세가 신중심의 폐쇄된 사회」라고 하거나 「인간성을 압살한 암흑시대」등으로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교회가 국가도 사회단체도 없는 민족 이동기의 사회를 교회시키면서 찬란한문화를 건설한 점, 가톨릭 정신에 입각, 사회질서를 재건하고 물질적인 번영과 지적 향상에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신부들은 위대한 학자가 돼 종교교육은 물론 인간교육전반을 발전시킨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이는 편견과 왜곡된 시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 흔히 르네상스시대「인문주의」가 교회에 반해서 일어났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도 인문주의란 용어를 낳게 한 그리이스·로마의 고전을 꾸준히 보전하고 연구해온 자가 바로 중세 교회였다는 점을 인식할 때 터무니 없는 말이다.
과학문명과 가톨릭교회
중고교 교과서에는 중세의 과학에 관해서는 나침반ㆍ화약ㆍ인쇄술의 3대 발명 이외에는 언급이 없으며 대학교재에도 기껏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를 교회가 탄압한 사실 정도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근대 이후에 비하면 서양 중세의 과학기술은 보잘것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거대한 성당 건축을 통한 건축술의 발달과 성직자들의 자연과학 방법론 탐구, 천문학 연구, 지리학 탐구 등에서 교회의 역할을 결코 무시할 수 없으며 근대 초기 이후 생물학ㆍ수학ㆍ물리학ㆍ의학ㆍ화학 등 오늘날 현대과학의 기초가 되는 제반 과학 분야에도 교회의 성직자 및 평신도들의 활약상이 지대한 바 있지만, 일반적인 역사서술에는 대부분 누락돼 있다.
대표적으로 보면 자연과학 연구의 기초 방법론인 귀납법(실증법)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흔히 알려지고 있는 17세기 영국의 「프랜시스 베이컨」이 아니라 4세기나 앞선 1200년대에 살았던 영국의 프란치스코회 수사 「로저 베이컨」이다.
천문학의 경우 15세기까지 유명한 천문학자는 모두 신부 아니면 수사였을 정도로 교회는 이 방면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고대와 중세 중반기까지 「프로메테우스」의 천동설이 지지를 받았고 교회도 성서를 근거로 이 설을 옳다고 여겼으나 「니콜라 쿠사」추기경、 「코페르니쿠스」신부 등이 그 허점을 발견하고 먼저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지동설을 최초로 주장한 것으로 교과서에 기록된 코페르니쿠스가 바로 천주교 신부였던 사실은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또 교회가 일방적으로 단죄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갈릴레오 사건」의 주인공 갈릴레오도 따지고 보면 그의 친구인 반디니 추기경의 물심양면의 도움을 받았고 심지어 당시 교황 울바노 8세는 연구비를 하사하기까지 했다.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가 자신의 지동설을 성서와 비교하며 신앙적인 부분까지 주장했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서만 교회가 처분을 내렸을 뿐 자연 과학 부문에는 언급이 없었다. 재판을 마치고 나오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했다는 터무니 없는 유언비어가 진실인양 유포되고 있을 뿐이다.
면죄부와 대사
종교혁명 이후 오늘날까지 이 「면죄부」란 용어만큼 가톨릭교회를 비방하고 매도하는 용어는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면죄부는 대사의 교리를 모르는 데서 나온 무지의 소치이며, 한편으로는 가톨릭을 중상 모략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흘린 말이기도 하다.
대사란 사람이 죄를 지었다가 회개하고 고백하면 일단 그 죄와 지옥 영벌은 면하게 되지만, 그 죄에 대한 잠벌은 남아있게 되는데 이때 이것의 전부나 일부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면제해 주는 은전을 말한다. 잠벌의 전부 면제를 전대사、 일부 면제를 한 대사라 한다.
예수가 교회에 「맬 권한과 풀 권한」(마태16、19)을 모두 부여했으므로 죄를 용서하고 벌을 감면하는 권한 역시 교회에 있다.
초대교회 때는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에게 엄한 재계와 고행을 보속행위로 명해 왔다. 중세 들어서는 양식이 달라져 기도·선행·성지참배·교회병원에의 헌금·성당건축을 위한 헌금 등으로 다양해졌다.
당시 성베드로 대성당은 지은지 1천년이 지나 대규모 보수공사를 해야 할 형편이었고 이를 위해 교황 레오 10세는 가장 평범한 대사를 반포한 것이다. 즉、 회개와 고백、 기도의 장려는 물론 대성당건축비로 응분의 헌금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잠벌을 면해주는 은전을 허락한 것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초대 교황인 성 베드로의 유해를 안치한 성소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전 세계 신자들의 지지를 요망하는 것은 아무런 모순이 없는 처사였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이때 교황은 헌납자가 각자의 형편에 따라 헌납게 하였다. 따라서 극빈자는 헌금 없이도 대사를 받을 수 있었다. 또 대사교리의 원칙상 아무리 거금을 헌납해도 회개ㆍ고백 등 전제조건을 이행치 않으면 절대로 대사를 얻지 못하게 돼 있다.
당시 교황은 독일에 대사령을 반포했다. 책임자인 알브레히트 추기경은 교서를 통해 대사의 조건(회개ㆍ고해성사 등)을 설명하면서 성전건립 헌금을 내는 사람에게는 고해신부를 선택할 수 있는 특전、이른바「고해 특전 준허증서」를 주었다. 가난한 자에게는 돈을 내지 않아도 이것을 주었다. 바로 이증서가 「면죄부」로 오인됐던 것이다.
한국 같은 비그리스도교 국가에서는 교회에 관한 문제에 있어 가톨릭교회의 입장과는 다른 시각이 늘 나올 수 있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복음 선포의 차원에서 잘못 왜곡된 사실들은 바로 잡는 노력이 무엇보다도 필요할 것이다.
왜곡 선전된 부분이 많으면 많을수록 복음 선포는 그만큼 더디게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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