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 인간은 그 스스로 아무 것도 한 일이 없건마는 이 세상에 지음받아 태어나고, 삶의 과정에서는 매 순간마다 하느님과 이웃의 도움으로 살다가 죽어서는 이웃의 손을 빌려 땅에 묻힌다. 실로 인간의 삶이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은혜로움의 연속」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러기에 「은혜에 대한 감사와 보답」이란 가장 중요한 인류의 하나가 아닐 수없다. 한해를 마무리 해 가는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 그 절정에 자리한 팔월 한가위에 우리 민족은 일찍이 하느님과 조상들의 은혜를 감사를 드렸다. 일년 열 두달 가운데 가장 풍요로운 시절, 폭포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황금빛 태양과 환한 대낮같이 눈부신 달빛이 그들의 그 가난했던 삶의 뜨락과 천리(天理)의 법도를 따라 살아온 그들의 내면을 속속들이비춰 「삶의 은혜로움」을 되돌아보며 하늘과 조상들에게 감사를 드렸던 명절이 바로 팔월 한가위 일 거이다.
▨둘 : 가난속에서도 더 없이 풍요롭고 정갈했던 우리 민족의 추수감사절. 해마다 이맘때면 나에게는 가난했던 소년기의 추억이 한폭의 그림처럼 되살아온다. 추석을 앞두고 해마다 나의 어머니는 햇살부신 뜨락에 「띠찰상 창호」의 묵은 창호지를 걷어내고 새롭게 단장했다. 가을 햇살에 북처럼 팽팽히 달라붙은 창호지의 흰빛은 어머니의 그 정갈하고 지순한 눈빛처럼 내 어린 마음을 더 없이 설레이게했다. 나는 어머니의 체취가 담긴 그 창호에 얼굴을 맞대고 오랫동안 그윽한 「딱향」에 취해 보기도 했다. 폐허의 6ㆍ25가 끝난 가난했던 나의 소년기,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뜻모를 설레임으로 취했던 그 향기는 아직도 내 삶의 가장밑바닥에 청정한 한줄기 빛으로 남아 출렁이고 있다.
▨셋 : 아름다운 추억은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지만 매정한 시간속에 우리들의 삶은 그렇치가 않은가 보다. 눈깜짝 할 사이 소년이었던 내가 장년이 된 걸 생각하면 남은 시간은 또 얼마나 더 빨리 지나갈지 짐작이 간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 변화는 참으로 놀랍다. 질병 같은 우리들의 가난, 그 수치와 모욕의 징벌 같은 가난과 맞서 싸워온 역사속에 지금 우리는 「돈을 물쓰듯, 흥청망청, 사치, 호화 … 」 등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던 지극히 낯선 단어들이 연일 신문의 머릿기사로 눈길을 끌더니 요즘은 경제위기설이 연일 지면을 메우고 있다. 익지도 않은 산열매를 서로 탐하여 앞을 다투어서 미리 따 챙기는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정신적 빈곤은 언제나 물질의 빈곤을 앞서가는가 보다.
「탐욕의 대명사」인 「돈」때문에 길가는 아낙네를 팔아먹고, 아버지가 딸을 팔아먹는 무서운 「맘몬의 나라」에서는 한때 물질이 베푸는 마력에 취할수 있을지라도 건전한 의미의 경제대국의 꿈은 하나의 환상일 것이다. 「하느님이든지 맘몬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시대에 살고있는 우리에게 이제 더 이상 긴 설명이 필요 없을것만 같다.
▨넷 : 예수는 물질에 대한 인간의 과도한 탐욕이 하느님을 부정하고, 거절하는 원흉인 것을 일깨워 물질에 자신의 행복과 구원의 희망을 거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허망함을 「어리석은 부자의 예화」(루가12, 16~21)로써 말씀하신다. 평생토록 먹고 남을 만큼 넉넉한 부를 축적하고 진탕먹고, 마시고 즐기는 동안 이 세상이 「잠시 머물고 떠나야 할 곳」임을 망각하고 물질이 약속하는 환영 같은 환상을 참 행복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어리석고 가엾은 인간의 말로를 「어리석은 부자의 예화」(루가12, 15~21)로써 경고 하고 있다. 「어느 부유한 사람이 땅(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16절)는 것은, 예기치 못했던 큰 수확을 땅(밭)에서 얻었다는 말씀은 그에게 생긴 부(富)가 자기노력만으로 된 것이 아님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이세상의 모든 「물리적 부」는 그 누군가의 도움으로 주어진「선물」이다. 그러므로 이세상의 모든 재화는 어떤의미에서 온전히 자기만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다. 하물며 부정한 권력과 결탁한 기업이나, 기업과 결탁한 부정한 권력자들이 축적한 부는 물론이고, 돈의 힘을 빌려 남의 몫까지 가로채는 약삭빠른 부동산 투기로 얻은 부(富)는 말 할 것도 없을 것이다.
「여러해 동안 흉작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 이 부유한 농부」 (19절)는 물질로부터 얻은 안정감과 포만감에 도취되어 자신의 운명과 종말론적 세상의 실상에 눈이 먼 사람의 상징적 인물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존재를 느낄 수 없을 뿐더러 설령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해도 자신의 삶과는 전혀 무관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며 살아가는 인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하느님의 부재나 무가치함」은 곧 바로 「이웃의 부재나 무가치함」으로 나타 날 수밖에 없다. 이웃의 삶과 생존의 기본권까지도 탈취하고도 가난한 이웃의 마지막 보금자리를 넘나보는 투기꾼이 그러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공으로 생긴 돈이기에 물쓰듯 하면서도 「가난한 과부의 머리위에 티검불」까지 걷어가는 「비뚤어진 자본주의의 절대신봉자들」을 이 「부요한 농부」는 상징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다섯 : 이 비유의 핵심은 탐욕의 물신을 숭배하는 지혜롭고 현명하며, 자기신념과 확신에 가득찬 인간을 가리켜 「가장 어리석고 가엾은 인간」이라는데 그 초점이 있는 것이다. 나의 몫은 물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의 몫까지 챙길수 있다면 가장 능력있는 인간이 된다는 강박관념에 포로가 된 이 시대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가혹한 역설이 있을수 있을까. 그러나 자신의 삶과 그 지평을 넘어 종말론적 영생의 삶을 내다 보는 인간이라면 이 역설속에 숨은 진리가 무엇인지 가늠하기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여러분은 온갖 탐욕을 주의하고 조심하시오」(15절)라고 한 예수의 말씀은 인간의 욕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신의 마력」에 힘입어 자신과 이웃을 파멸로 이끄는 「부정한 인간탐욕」을 만들어내는 「위험한 천국」, 오갖 사기와 부정, 음모로 화려하게 장식된 그들의 천국을 경계하라는 말씀일 것이다. 달동네, 산동네, 단칸방 월세, 20만 가구가 아직도 비닐 하우스에 살고 있는 서울, 평생을 일해도 삶의 가장 기본적인 주거공간도 마련할수 없는 이 사회에서 호화주택에 사는 가진자들은 갖은 지능적 수법으로 법망을 뚫고 호화별장마련에 혈안이 되어 있으니 불로소득이 판을 치는 사회에서만 볼수 있는 현상이 아닐수 없다.
노동자들은 이제 노동현장을 떠나 쉽게 돈을 벌수 있는 유흥업소로 몰리고, 생산현장은 이제 낡은 창고로 전락해 간다고 염려하는 이 사회의 지도자들과 가진자들이 볼멘 목소리가 무성하지만 우리의 근로자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며 이들의 말을 듣고 있을까.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생명을 걸고 투신했던 이 땅의 노동자들, 그들의 손에서 힘을 뺀 자들이 과연 누구였는지 우리는 다 함께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팔월한가위, 올해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정든 고향을 찾아 가고, 둥근 보름달은 예나 다름없이 분단된 우리들의 산하(山河)를 속속들이 환히 비추며 잊을 순 없는 얼굴이 되어 우리 가운데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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