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게시된 하느님은 삼위가 있다』. 신자는 이 말이 자기 신앙을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고 여기고, 그는 또 그렇게 배웠다. 그러나 이 말의 뜻은 항상 어렵게 느껴진다. 하느님을 자기 아버지로 생각하고 기도 할 수 있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 또 하느님이 성령으로서 우리안에 살아계신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신자들의 신앙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삼위(三位)가 세명의 귀신이 아니라 한 분의 하느님이심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로서 흠숭하는 하느님, 예수님안에 인간이 되신 하느님, 성령으로서 우리안에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세분의 「위격(位格)」으로 설명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위격」이라 함은 오늘날 자유와 인식능력을 가진 자주적 주체로 알아듣는다. 그러나 이것을 하느님에게 적용하면 잘못된 신앙이 될 수 있다. 즉 삼위일체를 세명의 하느님이 아주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 집합체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올바른 교리는 우리가 한분이요 같은 하느님을 공경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분의 3가지 존재모습은 바로 전통적으로 세분의 위격이라고 부른다.
모든 그리스도교파들이 이를 믿는다
모든 그리스도교파들이 삼위일체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한다. 이것이 그들 신앙의 근거가 되어있다. 지난 1981년에는 삼위일체 교리를 명백히 규정한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년) 1천6백주년을 기념하여 모든 그리스도교파들이 다시한번 이 신앙고백을 의무화하고 교회일치운동의 기초로 삼았다.
삼위일체의 신학적 이해도 역시 이미 초대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서기 500년경에 생긴 소위 아타나시오신경은 루터교 신앙고백에서도 인정하고 있는데 그 신경은『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한분의 하느님을 공경한다. 이는 일치안의 삼위, 위격의 혼동이나 본질의 분리없는 세 위격의 일치이다』고 하고있다. 여기서「세분의 위격-유일한 하느님」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이 신앙은 신학적 연구결과로 나온것이 아니다. 신학적 노력은 오히려 성서안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다. 성서는 뚜렷한 삼위일체교리를 설명하지는 않고 있으나 그 근거는 제시하고 있다. 아주 명백한 증언은 소위 예수님의 세례 명령에 있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라』(마태28,19).
예수의 삶과 행적은 자기 아버지 하느님과의 유일한 일치를 통해 결정되었다. 예수는 자신을 아버지 하느님과 동일시했다. 『나와 아버지가 하나인 것처럼』(요한10,30). 그리고 하느님의 영 즉 성령과도 일치하여 성령이 예수의 온 생애를 지배했다.
창조사업을 하느님 아버지가 하시고 구원은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이며 아버지와 같은 본질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했으며, 성화는 성령이 하신다는 것은 삼위일체의 구세사적 해석이다.
하느님은 결코 외로운 하느님이 아니다
삼위일체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하느님은 결코 외로운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을, 움직이지 않는 하느님이 아니라 끊임없는 생명의 하느님이며 전무후무한 일치의 하느님이며 서로 교환하고 나누어주며 전해주는 하느님이라는 기본적인 뜻을 포함하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요한4,8)는 말씀은 삼위일체가 무슨뜻인지 짐작케하는 말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또 다른 의미는 하느님안에 인간 공동체의 근거와 모델이 있다는 것이다. 즉「나-너-우리」의 관계다. 지배의 모델이 아니라 공동체의 모델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은 그리스도교 신앙생활과 영성의 기본 모델이다. 신자들의 기도도 삼위적이다. 이 기도는 아버지에게, 아들을 통해서「성령의 일치안에서」한다.
우리가 모든 기도, 미사, 전례시작때 하는 십자성호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고백인 것이다.
여기서 삼위일체는 유일신에 대한 반대가 결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믿음은 창조사업과 구원과 성화사업에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한분의 하느님에 대한 고백이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살아계시는 한분의 하느님에 대한 고백이다.
생명과 사랑이 그 분안에 있기에
삼위일체의 하느님에 대한 고백은 아무도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신비이다. 이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넘쳐 흐르는 사랑의 신비이다. 하느님은 결코 외로운 분이 아니라 자신의 넘쳐 흐름에서 나누어주고 전해주는 하느님이며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일치로 산다. 또 자신안에 생명과 사랑이 있기에 그분은 우리에게도 생명과 사랑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영원에서부터 하느님의 신비속으로 포착되어 있다. 하느님은 영원에서부터 우리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놓고 있다.
결국 삼위일체의 신앙고백은『하느님은 사랑이시다』(요한4,8 ㆍ16)라는 말의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최후의 가장 깊은 실제는 생명과 사랑이라는 것을, 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안에서 이 실제에 참여하도록 허락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신앙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 우리는 당신에 관해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정말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이해를 능가하시고, 우리의 말도 뛰어넘으십니다. 당신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 스스로를 우리에게 드러내주셨습니다. 그후로부터 우리는 당신을 증언하고, 전파하고 당신을 찬미합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신 당신을』-바실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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