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 모짜르트의 고향 오스트리아「살쯔부르그」는 모짜르트의 명성으로 세상을 널리 알려진 도시이다. 거대한 알프스 산맥의 웅대한 기운이 잠시 숨을 죽인 살짝 강변의 도시「살쯔부르그」는 천재 모짜르트의 번뜩이는 예지와 예리한 감성이 음악의 전통성과 서로 어울려 감미로운 고전음악의 극치를 이루어 낼수 있는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인간문명이 조화를 이룬 도시라고 할수 있다.
구라파 중세도시 형태가 모두 그렇듯이 이곳 역시 절대군주시대의 화려했던 교회의 모습을 오늘날에도 쉽게 찾아볼수 있는 곳이다. 도시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주교좌 성당을 중심으로 나란히 베네딕도 수도회와 프란치스꼬 수도회가 화려하고 웅장한 위용으로 지나간 시대 교회의 그 엄청난 권위와 영화를 말해 주고 있다. 지금도 로마시대의 유적의 발굴이 계속되고 있는 그곳 베네딕도 수도회에서 나는 한해 여름을 지낸적이 있다. 천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그 수도원은 수백년 묵은 문서고와 도서실, 각종 미술품으로 그야말로 수도원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곳이였다. 나는 그곳에서 이 세상에서의 교회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더없이 귀한 체험을 할수 있는 보람된 시간을 보낼수가 있었다.
▨둘 : 그러나 그 수도원에 가던 첫날부터 나는 도무지 이해할수 없는 일이 하나있었다. 그것은 하루에도 몇번씩 성무일도를 드리는 지하경당 중앙 통로 바닥에 바닥돌로 놓인 어느 주교의 조상(彫像)을 모든 수도자들이 밝고 지나가기 때문이었다.
위엄에 찬 주교관을 쓰고 지팡이를 든 주교의 얼굴, 너무도 뚜렷한 그 상을 밝고 지나는 것은 나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곳을 지날 때 마다 그 석상을 피하여 한 발자국 돌아 갔지만 태연히 그 얼굴을 밟고 지나는 그곳 수도자들의 태도에 대한 나의 의구심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갔다. 마침내 그해 여름이 다 지나는 어느 주일 오후, 나는 우연히 그 경당에서 만난 노(老) 원장에게 나의 의문을 털어 놓았다.
아흔이 가까운 백발의 노신부님은 엷은 미소를 머금은채 경당 바닥을 응시하며『저분은 마르틴 루터가 한때 몸담았던 아우구스틴 수도회의 원장이였답니다. 저분은 세상에서 교만하게 살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를 대신 밟아 줌으로써 그를 돕고 있는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예기치 못했던 그의 대답은 나에게 참으로 큰 충격이 아닐수 없었다. 그 신부님의 빛나는 눈빛에 너무나 무거운 여운이 깔려 있었기에 나는 더 이상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마르틴 루터의 원자이었던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어떤 연유로 하여 그곳에 묻히게 되었는지, 나는 그 내력을 아무에게도 묻지 않고 그곳을 떠나 왔다. 어쩌면 그 원장신부님의 말씀은 나의 호기심을 송두리째 앗아 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수도자로서 한생애를 투신했던 삶, 그러나 지금은 저 차디찬 돌바닥에 걸맞지않은 관을 쓰고 누워있는 낯선 사람, 영원한 침묵으로 그는 살아있는 수도자들에게 삶의 모든 비밀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셋 : 이 지상의 교회는「자애로우신 어머니」로 표상되고있다. 넘치는 사랑으로 자녀들을 구짖고 타이를분 아니라 끝없는 용서로서 그품에 맞아들이는 어머니와 같이 교회는 이세상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친 말씀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머니들이 때때로 그 자녀들을 자기의 욕망과 허영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삼듯이 교회의지도자들도 성서에 표현되는「작은 이들」의 어깨위에 놓인 멍에를 풀어 해방을 선포하기 보다는 오히려 무서운 죄의 올가미를 씌우고 마치 하느님의 은총을 스스로 분배하고 관리하는 약삭빠른 청지기 처럼 그들을 불모로 잡고 세상의 권력과 영화를 누렸던「타락한 교회」가 세계 도처에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있다.
「이기심」이라는 인간의 뿌리깊은 죄성(罪性)을 간파하신 예수는 당신의 제자들의 지배욕과 독점욕을 철저히 경계하셨다.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금지시켰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는 그들을 꾸짖으시고 나무라셨다 (마르꼬9、38~41참조).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공동체 밖에 있는 이들을 철저히 배제하는 제도화 되고 경직된 종교적 독선을 예수는「작은 이들」의 걸림돌(스캔달)이 되는 행위로 간주하셨고,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조직속에서의「소속」과「무소속」, 제도교회의「인준」「비인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착한 행위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40절참조).
예수에 의해 시작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은 사회적지위나 교육수준을 바탕으로 막강한 권력과 완벽한 조직력을 갖춘 강자위주의 체제가 아니라「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공동체」특히「작은이들」이 앉을 자리가 마련된 공동체 일 때 비로소 진정한 하느님의 공동체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넷 : 그러므로 예수는 공동체에서 소외되는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표상하는「작은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들을 예수는 무섭게 저주하고 있다 (42절 참조).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하여 남을 모질게 대하고 증오와 원한을 맺게하여 하느님과 인간으로부터 외면 당하고 버림 받은 것 처럼 느끼제 하는 자들이야 말로 하느님을 부정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거스리는「악마적 걸림돌을 놓는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온갖 부정과 사기로 이웃에 대한 불신의 폭을 증폭시키고, 원망과 원한의 악순환의 질곡으로 하느님과「작은 이들」을 몰아 넣는 이들의 행위와 행동 (손과 발), 그 부정한 의지(눈)를 끊어 버릴 때 이들 스스로도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손과 발, 눈이 벗는 불구의 몸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낫다」 (42~48절참조) 고 성서는 우리에게 히브리적 비유로서 표현하고 있다.
▨다섯:「한국 갤럽 조사연구소」가 최근 펴낸「한국과 세계 청소년의 의식」조사 보고서에는 우리사회는 너무나「가문과 배경만을 중시한다」는 청년이 무려 74%를 차지하고「빈부의 격차, 근면한 사람이 푸대접 받는 사회」로 우리 사회를 부정적으로 보고있다.
아울러 경찰청의「90년도 범죄백서」에는 우리나라 자살자가 한해에 무려 7천5백여명에 이르고 그중 생활비관자가 3천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삶의 맛을 일찍부터 잃어버린 우리들의 청소년들과 삶을 비관하여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수 많은 우리들의 이웃들게게「무형의 걸림동을 놓은 자는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오늘 이 당에 함께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생명과 구원에 이르는「징검돌」대신에 이들앞에 놓은「이 시대의 걸림돌」은 과연 무엇일까. 그「걸림돌」을 우리가 단호히 거절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오늘의 교회는 이 사회에 참된 희망이 무엇인지를 선포할 수 없을 것이다.
어둠에 묻히는 가을저녁, 창가에 앉아서 나는 그 언젠가 살쯔부르그 수도원 지하경당의 석상을 조용히 밟고 제단에 오르는 그곳 수도자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의 그 침묵의 행렬이 무거운 어둠을 뚫고 지나는 투명한 바람같이 나의 내면을 흔들며 지나는 것을 오늘 이 저녁, 다시 눈여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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