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 하늘도 땅도 싱그러운 물빛에 젖어 있는 가을아침, 강가에 서서 찬연한 햇살속에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바라본다. 바람 한점 없는 물위에 한가로운 음악이 되어 흐르는 눈부신 고요. 저 끝없는 흐름으로써 오히려 부동의 침묵을노래하고 있는 강과 같이 무상한 시공의 흐름속에 던져진 「자기 실존」을 「오 ! 흐름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혼(魂) 」이라고 불운한 시대를 살고간 우리들의 시인은 이 지상에서의「삶의 비밀」을 노래했다.
그 어느곳에도 매인곳 없이,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고 일체의 분별과 사념의 경지를 떠나 유유히 흐르면서도 충만한 기운과 가득찬 생명으로 일체의 것을 내어 맡긴채 흐르는 저 무위(無爲)의 흐름을 일컬어 무심「無心」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머리로써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알고, 신비에 갖힌 「존재의 문」을 열고「봄」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불교의 선사(禪師)들의 그 무심(無心)의 경지는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첫째 조건으로 제시된 「어린이의 마음」 (마르10, 15 참조)과 동등한 것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의 문앞에서 필자는 아직도 흔미한 미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분명히 그 경계를 가릴 길이 없으나 「신(神)을 알아 듣기는 어렵지 않지만 그 품에 안기기는 어렵다. 깨닫는 것과 안기는 것 사이에는 너무나 먼거리가 가로 놓여 있다」라고 한 「파스칼」의 말은 무심(無心)을 넘어서 지향하는 예수의 말씀의 행방이 어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둘 : 마르꼬 복음 10장 1절에서 16절에는 두가지 짧은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그것은 바리사이들의 간교한 질문으로 시작되는 「이혼논쟁」과 「어린이에 대한 예수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하고 바리사이들이 예수께 물었다』 (2절). 예수시대 유대교에서 가능했던 이혼을 예수가 인정한다면 사랑에 대한 그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위해 될것이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유대 율법에 예수는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써 세례자 요한과 같이 죽을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예수를 진퇴양난의 올가미속에 가두려는 책략이 깃든 사악하고 계획적인 질문이었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모세가 여러분에게 어떻게 명했습니까?』하는 질문으로 대치 된다. 그들이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가 허락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는 『모세는 여러분의 그 완악한 마음때문에 그 계명을 남겼다』고 대답하셨다. (6절). 예수는 그 규정이 인간이 만든 일시적 규정이고, 창조때부터 하느님이 세우신 법은 결코 아내를 버릴수 없으며 남녀는 혼인으로써 영원히 갈라질수 없는 한 몸을 이룬다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1, 27:2, 24참조). 이로써 예수는 일부일처제와 결혼의 불가해소성을 천명하셨다. 아울러 남성 위주의 유대인의 사고방식, 연약한 여성을 지배하고 어린이들을 부모들의 소유물처럼 여기는 당시 유대사회의 결정적 모순을 질타하시며 어린이들을 축복하셨다. (13~ 16참조).
▧셋 : 예수에게 악의에 찬 질문으로 예수를 올가미에 가두려고 획책한 사람들 소위「슬기롭게 똑똑한 사람들」로 성서에 묘사되는 이들 율법전문가와 교사, 바리사이들은 독선적인 열정과 광신적이고 맹목오만으로써 무식한 사람들과 하층계급의 사람들을 업신여긴다. 이들은 똑똑하고 배운 것이 많아서 오히려「하느님의 나라」를 순수히 받아들일수 없는 사람들로 나타나고 있다. (마태18, 1~5참조).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하나같이 먼저 깨닫는 사람들은 「어린아이들」로 묘사되는 어리석은 사람들과온갖 멸시를 받는 암ㆍ하아레츠(속세의 가난뱅이들)였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진리에 대한 인간의 두 가지 태도에 달린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머리로 아는것」과 「마음으로 아는것」과의 차이이고 「앎」과 「깨달음」의 차이 일것이다. 진리를 인식의 대상으로만 보아 지적인 욕구충족과 정신적 소유욕에 사로잡혀 독선과 오만으로 「두꺼운 탈을 쓴 인간」과 순진무구한 진실로써 진리의 품에 안기는 「믿음의 인간」이라는 엄청난 차이에서 오는것임을 성서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고 할것이다.
▧넷 : 예수께서 말씀하신 「어린이와 같은 마음」이란 무한한 사랑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러므로 「주여, 내 뜻대로가 아니라 오직 당신 뜻대로 하소서」하고 이 지상에서의 최후의 삶을 마감하신 예수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어린이의 마음」으로 살으신 분이라고 해야할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로서 고난과 투쟁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내놓으신 예수의 삶에서 보듯이 「어린이의 마음」이란 무상으로써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외탁도 아니고, 기력과 얼이 빠져나간 맹목적 순종은 더욱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절대적 사랑에 대한 끝없는 갈망과 청정한 원의로 충만된 에너지라고 해야 할것이다.
▧다섯: 「아! 하느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불타는 사랑의 고백으로 꽃다운 2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현대의 성녀「소화(小花) 데레사」, 그녀의 큰 깨달음으로 제시된 「작은자의 길」은 「하느님 앞에 어린이」가 무엇을 뜻하는 지를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극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하느님 앞에 어린이로 있다는것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말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의 허무를 인식하는 것입니다…그리고 어린이가 그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기대하듯이, 아무런 걱정없이 자기를 위해 그 어떤 것이든 재물을 모으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위해 마침내 나는 사랑과 희생의 꽃을 꺾어 바쳐드리는것밖에 아무것도 못하는 어린이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이로 있다는 것은 자기의 잘못을 보아도 실망하지 않는것입니다. 어린이는 자주 넘어지기는 하나, 너무 작아서 그다지 큰 상처를입지않습니다』라고 성녀는 말했다.
▧여섯: 모든 가치체계가 물질화 되어가고 「전략적 가치」로 전락되어 가는 이시대에 과연 우리 교회에서 말하는 「공부」라는 것이 무엇을 자칭하고 있는지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 해 봐야 할것이다. 서구의 합리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풀이 된 깡마른 지식으로만 복음의 메시지를 수용하거나, 충동적이고 격정적인 인간의 감정에 의존하여 하느님의 뜻을 판독하려는 이 두 극단 속에 오늘 우리교회는 자신의 교유한 매력을 스스로 상실해 가고 있다고 말할수있을 것이다.
70년대 이후, 급격히 우리교회로 몰려 왔던 많은이들이 지급 교회를 떠났거나 떠날 채비를 차리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교회의 각종 통계자료를 미루어 알수 있다. 하느님과 사람앞에 겸손하고, 타인데 대한 지배욕을 버리고 온갖 이기적 편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어린이와 같은 갊」이 「예수의 제자들의 길」임을 다시 확인하고, 우리 문화의 뜨거운 숨결이 담긴 상징적 언어를 우리가 배워 익혀, 우리 스스로가 예수안에서 거듭 태어남으로써 「마음의 눈」이 열릴때 우리는 비로소 이 시대를 함께 사는우리 이웃의 마음에 무심 (無心) 을 넘어서 이르는 「하느님의 사랑」과 그 나라를 진실로 전할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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