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 불과 2~30년전 만하여도 시골 동네 아낙네들이 모이면 누구 누구네 집아무개는 얼굴이「달판」같다고 하는 얘기를 들을수 가 있었다. 달처럼 희고 둥근 얼굴이 그 당시 여인들의 이상적 미(美)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말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지만 만약에 오늘날 서양 처녀들에게 똑같은 말로 『당신 얼굴은 보름달 같습니다』하고 말한다면 즉시 뺨을 맞게 되기 십상일 것이다. 왜냐하면 「보름달」이란 말은 그들 문화권에서는 오늘날 우리 말의 「호박」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양의 17세기, 바로크시대의 그림을 보면 한결같이 여인들의 얼굴은 둥글고 복스럽게 생겼다. 미적감정은 시대를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이러한 변화의 근저에는 「문화의 선호성」이라는 인간의 심리적 배경이 있다고 본다.
다산(多産)이 무엇보다도 큰 축복이였던 원시사회에서의 이상적 여인상은 오로지 많은 출산을 가능케 할수있는 「튼튼함」에 그 기준이 있었다. 오지리 빌렌도르프에서 발굴된 2만년 전의 여신상(女神像)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서 이 사실을 우리는 오늘 볼 수가 있다.그러나 오늘과 같은 산업사회에서 여성의 외모는 「안락함과 부(富)의 상징」이라 할수 있는 날씬한 서구적여인의 모습이 모든 여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듯하다.
▧둘 : 인류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 유행 가운데서도 가장 민감한 것이 여인들의 옷차림과 머리모양이 아닐까. 고대중국은 물론 3천년이란 장구한 세월 동안 불변의 양식으로 전승되어 온 이집트미술에서도 여인들의 머리모양은 끊임없이 변해왔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서양의 어느 작가는 모든 유행이 「변덕스러움」이라는 「여성적인 것」에 기인한것이라고 규정했지만 유행은 여인들의 전유물만은 아닌것같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유행은 예외가 아니었다. 그 한 예로써 미트라 (Mitra: 교황ㆍ주교의 관)의 모양은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천해 왔다. 한 시대에 유행하던 미트라의 형태는 전세계교회 안에 유행되었다.
이러한 미트라의 역사 속에 한가지 특이한 점은 교회의 권위가 막강한 시대 일수록 미트라의 높이가 낮아지고 교회의 권위가 실추될수록 미트라의 높이는 상대적으로 높아졌다는 점이다. 얼마전 어느 교구 성체대회에서 주교님이 미트라를 쓰고 금빛 지팡이를 짚고, 행렬하는 장면이 잠시 TV 화면에 비친적이 있다. 이 장면을 보면 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성체,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와 금빛 미트라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거동하는 주교님….
▧셋 : 화려한 저 「권위의 상징」뒤에 있는 「실재」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전통과 관례」라는 막연한 의미가 아니라 보다 원초적인 「인간의 원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어느 교황님과 주교님이 삼복더위에 그 무거운 제의를 입고, 지팡이를 짚고 미트라 쓰기를 원하겠는가. 그것은 다만 신도들이 그들의 대표자로서 또 제관으로서 화려하고 권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주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솔직이 말해서 이러한 서양의 중세기적 상징이 더 이상 우리에게 의미를 지닌것이 아니라고 본다. 사실 권위라는것은 어디까지나 상관적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이라 볼때 우리 교회안에서 성직자의 권위를 어디에 근거해서 바라보야야 하는가는 참으로 중요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본다.
▧넷 : 마르코 복음 10장 35절에서 45절에 바로 이러한 제자들의 권위가 어디에 근거해야 되는지를 말하고 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예수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제자들과 함께 걷고 있는 참으로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미 세 차례에 걸쳐 예수는 당신의 수난에 대해서 말했지만 제자들은 예수의 뜻을 알아 듣기는 커녕 온 천하를 호령하게 될 메시아의 나라를 기대하고 잔뜩이나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 급기야 그들 중에 두 젊은이가 나서서 예수께 말씀을 건넨다.,
『선생님, 저희가 선생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선생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선생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35~37절). 자기들의 원의를 말하기도 전에 예수께 다짐부터 받았던 이두 사람은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별명을 지닌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었다(마르 3, 17:루가 9, 54참조).
약삭빠르고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짙은 이 두 제자뿐만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사실은 그들과 같은 심정이었다는 것은 다른 제자들이 이들의 말을 듣고 「몹시 언짢아 했다」는 것으로 우리는 알수있다(41절).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는 어리석은 인간의 탐욕에 대한 분노 보다는 연민을 느끼면서 이들을 향해『당신들은 스스로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37절)하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 하느님의 의지와는 언제나 빗나가는 인간의 어리석은 의지, 자신의 눈먼 이기심과 탐욕으로 어둠속으로 헤매는 인간의 비극을 느끼게 하는 이 사건은 모든 세대를 통해 인간의 심금을 울리게 하는 사건이 아닐수 없다.
예수의 「잔과 세례」즉 그분의 「수난과 죽음」보다는 아무런 고통도 없이 남보다 먼저 자기만의 영광과 영화를 꿈꾸는 인간의 본성을 간파하신 예수는 제자들을 모두 가까이 불러모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백성들을 다스리는 사람들은 엄하게 지배하고 그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억압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이에서는 그럴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서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남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고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습니다』 (42~45절).
▧다섯 : 국가의 왕좌와 교회의 제단을 동일시 하여 십자가 대신에 영광된 정복자의 깃발을 꽂고 다른 모든 민족들을 야만인, 미개인, 이방인으로 취급하여, 그리스도 교화를 문명화로 착각했던 선교시대를 우리교회는 살아왔다. 아울러 교회는 성직자를 교양인으로 평신도는 무식하고 보잘 것 없는 우둔한 무리로 치부하고「기도하기, 순종하기, 헌금하기」만을 권장하여 교회를 철저히 위계사회로 만들어 놓았던 시대를 교회는 살아왔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러한 우둔하고 미련한 인간의 욕심속에서도 또 다른「인간을 통해」끝없이 창조와 쇄신의 역사를 이끌어 왔다. 모든 것이 불가능 하게 보이는 시대에도 잘못된 권위에 도전하는 인간을 통해 하느님의 신령하신 역사(役事)는 이루어 졌으니 신학자「왓벗 뷜만」은 이를 가르켜「하느님의 엄청난 모험」이라고 했다
그리스도교적 모든 권위는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봉사적 권위이다. 이러한「섬김과 희생」을 위해서 만이 권위는 비로소 참된 의미가 있음을 복음성서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남을 지배하려는 생각」그것이 비록 남을 좋게 변화시키는 것일지라도 자신의 힘에 의해 하려는 것은 그리스도교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 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우리모두가「우리가 하느님께 청하는것이 무엇인지」를 그분 앞에 끊임없이 성찰 할때 만이 우리는 그분의「잔과 세례」를 함께 받아 마실수 있는 예수의 제자가 될수 있을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