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위에서 왔다」, 「나는 아버지께서 보내서 왔다」, 「나는 세상에 생명을 주러왔다」 이 근원의 진리를 믿으려 들지 않는 유대아인을 향하여 예수께서는 마지막 목소리를 돋우어 그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쓰신다.
이 진리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이름 「나는···이다」를 지녔고 사람들이 죽지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하려고 오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데서부터 구원의 빛을 받게 된다. 이것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과의 차이는 천양지 차이이다. 믿음으로써 하느님 아버지께로 올려져 생명을 얻게 될 것이며 믿지 않음으로써 생명을 잃고 죽음의 무덤으로 갈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엄청나게 믿기 어려운 말씀을 하실 때마다 유대아인들은 어김없이 『당신은 누구요』라고 물었다. 그들은 예수를 한낱 갈릴래아 사람, 또는 나자렛 예수, 또는 마리아의 아들, 아무아무의 형제로 밖에는 알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당신이 누구요라고 물을 때에는 체포의 구실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나는 예언자요」라고 대답하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면 예언자의 표를 보이라고 추궁할 수 있을 테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누가 「나는 되살아 난 공자요」라고 한다면 그를 모두 미친자라고 할 것이다. 예수의 적대자들의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기대하는 예언자 대답은 세례자 요한에게 돌리면서 요한은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 아니 더 나아가서는 예언자보다도 더 큰 인물이라고 대답하셨다. 그때 요한은 이미 체포된 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당신자신에 대하여는 「나는 그분이다」, 또는 「나다」라는 말씀으로 당신의 신원을 밝히셨다.
사실 예수의 확실한 신원을 묻는 적대자들에게 이 대답은 법적으로 걸고 넘어갈 아무 근거도 제공하지 못한다. 그런데 「나다」라는 표현은 이미 말했듯이 (대목108참조) 어마어마한 표현이다. 구약에서 모세가 하느님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하느님 자신이 직접 가르쳐 주신 이름이 「나다」였고 (출애 3, 14 이하) 그 이름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며, 하나이시며 진실하신 하느님이란 뜻으로 풀이 되었다(신명 32, 39).
제자들이 바다 한가운에서 풍랑을 만나 죽는 줄로 알고 있을 때 물위를 걸어 그들에게 가까이 갔을 때 그들을 안심시키며 「나다」라고 말씀하셨다(마태 14, 27:마르 6, 50:대목104참조). 「나다」라는 표현은 「나는 너희의 구세주 하느님이다」라는 명확한 뜻이 되겠는데 요한 복음서에서는 하느님의 품성을 들어 표현하고 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6, 35), 「나는 세상의 빛이다」(8, 12), 「나는 문이다」(10, 7, 9), 「나는 착한 목자이다」(10, 11, 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 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 6), 「나는 포도나무다」(15, 1, 5) 이상을 예수의 일곱가지 하느님 이름이라 부르는데 이 계시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고 진실된 구세주이시라는 것을 요한 복음서는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감안할때 25절의 「처음부터 내가 누구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느냐」라는 말씀은 원문이 분명치 않다는 학자들의 의견이 있기는 하지만「처음부터(태초부터) 나는 너희에게 말한대로의 존재이다」라는 뜻으로 알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나다」라는 예수의 신적인 이름을 믿지 않으면 그 불신자체가 영영 돌이킬 수없는 죄가 되어 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으로 줄달음칠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파견을 받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이미 일곱번이나 말씀하셨고(요한 3, 13. 34:6, 33~35, 38.51. 58:7, 28)이번에 또 다시 같은 말씀을 되풀이 하여 강조하신다. 그러나 그들을 납득시키는데는 실망스러웠다. 예수와 그 적대자들과의 대화는 끝까지 평행선을 긋고 있다. 알아듣지 않으려는 청중과 그래도 납득시키려고 갖은 애를 쓰는 선생님과의 대화를 지켜 보는것 같다.
예수의 말씀은 그들에게 우이독경이다. 아버지의 파견을 받아서 온 분은 아버지의 메시지를 받고 왔을 것이고 그 사명은 언제나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파견받은 이가 바로 당신자신이며 당신을 보내신 분은 참되신 하느님이시므로 당신이 말하는 것은 곧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선포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의 말이 아니고 오로지 나를 보내신 분의 분대로 말하는 것이다」(26절)이 말씀도 이미 여섯번이나 되풀이하여 강조 하셨다.(요한5, 19이하, 26~27. 30. 43:6, 37~41:7, 16~18).
그러나 아버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처음부터 믿으려 들지 않는 유대아인들은 예수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하느님께서 보낸 이라는 것을 알아 듣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참으로 하느님의 이름에 부합하는 분이며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는 분이시라는 것은 그들이 사람의 아들(예수께서 당신을 가리키는 호칭)을 높이 들어 올린 뒤에야 알게 될 것이다.
높이 들어 올린다는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의 표로 높이 올렸던 구리뱀(민수21, 9)을 상징으로 구세주의 십자가에 달림과 부활, 승천을 뜻한다(대목35참조). 사람의 아들이 높이 올려진다는 표현은 요한 복음서에서 세번(3, 14~15:8, 28: 12, 32) 나오는데 오늘의 말씀은 두번째이다. 세번 언급된「높이 올려짐」은 공관 복음서의 세번에 걸친수난에 관한 예언(마태16, 21:17, 9~13:20, 17~27 및 병행복음귀절)에 해당된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면서 유대아인들은 저들 손으로 구세주의 사명을 완성시키는 얄궂은 협력자가 된다. 그들은 그 때에 가서는 믿지는 않겠지만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믿는 많은 사람들을 보며 진실을 알게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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