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고대는 서기 30년경의 성신강림으로부터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까지를 포함하는 시기이다.
이 시대는 종교자유가 주어진 313년을 분기점으로 해서 다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이교적인 제국에서 교회가 투쟁한 시기이고, 후기는 그리스도교적이 된 제국에서 교회가 자유롭게 행동한 시기여서 두 시기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교회사의 시작을 성신강림으로 잡은 것은 이때부터 교회의 공식활동이 시작된 때문이고, 성신강림을 33년이 아닌 30년 경으로 본 것은 서기의 잘못된 계산 때문이다. 예수의 탄생을 기원으로 하는 이 서력(西曆)은 6세기의 한 수도자(소 디오니시오)에 의해 고안된 것인데, 애당초 3년 내지 5년의 착오를 일으켰고, 그래서 그만큼 연대를 올려 잡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역사가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므로 성신강림은 30년 이전일 수도 있다. 그리고 고대의 말년은 476년으로 잡은데 대해서는 이 점에 대해 교회사가들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견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고대 전기
성신강림 직후 예루살렘에 최초의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생기고, 이어 안티오키아에 최초의 이방인 교회가 탄생한다. 여기서부터 복음은 멀리 그리스ㆍ로마 세계로까지 전파된다.
복음의 전파로 이교세계와 마찰이 생기고 그 결과 박해가 일어난다. 그러나 교회는 순교자들의 덕분으로 박해를 이겨내게 되고, 한편 이교 로마제국은 교회에 종교자유를 허락하지 않을 수없게 된다.
바오로 사도는 메시아의 내림에 대해 『때가 찼을 때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셨다』(갈라 4, 4)는 의미 깊은 말을 남겼다. 「때가 찼다」는 것은 이미 이 세상이 메시아와 그의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이러한 준비는 긍정적인 것만이 아니고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전자는 복음전파에 도움을 주었고 후자는 도리어 장애가 되었다.
교회사를 신앙의 빛에서 인식하면 일반 역사가 된다는 말을 했었다. 복음이 처음으로 전파된 무대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바오로가 말한 「준비」란 신앙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한편 역사가들은 그것을 단순히 역사적 관점에서만 관찰하기 때문에 「시대적 배경」이란 말을 사용한다. 견지와 해석이 다를 뿐, 사실 자체는 같은 것이다.
이만 개관을 끝내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먼저 복음이 전파된 세계의 시대적 배경 내지는 복음에 대한 준비 여하를 고찰하고 다음 그 무대에서 복음을 처음으로 전파한 사도들의 활동을 보기로하자.
복음전파의 무대
이 무대는 유대인 세계, 로마인 세계, 그리스 문화 세계, 이렇게 셋이다.
유대인 또는 유대교 무대의 특징은 한마디로 순 종교적인 것이다. 유대민족은 유일신(唯一神) 야훼를 공경하며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율법을 엄수하면서 회당에 모여 기도하고 성경 말씀과 그 해석을 들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 민족의 유일한 성전이었다. 이와같이 유대 민족은 높은 수준의 종교와 도덕을 유지하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의 종교는 민족적인 편협과 형식적인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티나만이 아니고 제국의 큰 도시라면 어디에나 있었다. 이들이 이른바 디아스포라(Diaspora, 산재)이다. 다행히도 이들은 팔레스티나의 유대인들처럼 편협하거나 완고하지가 않고 보다 개방적이었다. 일찍부터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있었다는 (70인역ㆍSeptuaginta)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헬레니즘에 적응하려 했는가를 알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인의 역사나 종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그래서 처음에는 그리스도교도 그 일파로 간주되어 유대교의 보호아래 자유롭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 또 그들의 회당은 복음선포의 최초의 장이 되어 주었고, 뿐더러 제국의 어디에서나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통해 이교인과의 접근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유대교는 미구에 그리스도교에 적대적이 되어 박해까지 일으켰다. 그러나 마침내 70년의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는 유대 민족의 정치적인 종말을 고하게 했고, 이에 따라 그리스도교도 유대교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기에 이르렀다.
로마인 세계는 한마디로 그 특징이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 정치적 세력이었던 로마제국은 지중해 연안의 대륙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북아프리카와 브리타니아 동서로 스페인과 다뉴브강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제국을 이루고 있었다. 또 정치적으로 안정과 평화를 누리고 있었고 언어도 그리스어와 라틴어, 문화도 그리스ㆍ로마 문화로 통일되어 있었다. 이러한 전반적인 평화, 통일된 언어와 문화 그리고 넓은 도로, 편한 교통수단등, 무엇보다도 유대교에 대한 관용 정책은 복음전파를 보장해 주었을 뿐더러 용이하게 해주었다.
그런데 종교와 도덕만은 그렇지가 않았으니 종교는 다신적(多神的)이 었고 도덕생활은 매우 타락해 있었다. 게다가 동방에서 들어온 신비 종교들이 마술적인 종교의식을 유행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 계층에서는 이러한 종교들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내면적이고 유일신적인 종교를 동경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이 또한 복음전파에 유리하게 작용하게 되었다.
한편 유대인에 대한 로마인의 멸시, 무엇보다도 황제숭배의 강요는 복음전파에 가장 큰 장애가 되었을 뿐더러 박해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그리스 문화세계의 가장 큰 특징은 철학적인 것이었다. 다시말해서 오로지 이성과 지식만을 추구했고 종교도 철학적으로 이해하려 했다. 그런데 당시 복음이 침투해 들어간 이곳 세계는 거의가 헬레니즘의 그리스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철학과의 만남에서 교회는 종교를 철학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고, 또 그리스어를 신약성서의 공용어로 채택함으로써 복음을 더욱 풍부한 표현으로 후세에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 이성과 지식의 지나친 강조는 교회 안에 교의논쟁을 일으키고 이단을 낳게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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