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 설악산에 첫눈이 내렸다는 소식이 전해 온다.
중국 당대(唐代)의 시인, 두보(杜甫)는 「봄은, 보는데 또 지나가나니」라고 노래했지만 시간의 흐름은 물과 같아 그 경계를 가늠할 틈도 없이 그누구도 막아 낼수 없는 무상한 변화속에 우리를 서게 하는가 보다.
며칠 전 나는 참으로 오랫만에 서울 근교 어느산을 올랐다. 성미급한 단풍나무들은 이미 붉은 빛을 띄고 있었지만, 여름날 그 무성했던 나무잎들은 청정한 가을바람결에 더욱 더 푸른 빛으로 마지막 녹색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빛 보다 더밝은 그늘」아래를 걷다 보니 어느덧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매연으로 뒤덮인 도시, 거대한 괴물처럼 누워있는 그 도시의 잿빛 하늘위에서 이름모를 별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나는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명멸해 가는 그 별빛에 시선을 모았다. 태양의 주위를 끊임없이 돌고 있는 이 작고 아름다운 떠돌이별, 지구 위에서 지금 나는 그어느 은하계의 혹성으로부터 수십억 광년을 달려온 저 별빛을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살아 있음이 기적같이 느껴졌다. 무한한 공간과 시간속에서 나에게 달려온 저 빛과 만남, 나의 이 순간적인 만남은 저 별빛이 전달된 시간과 공간에 비교한다면 차리리 무(無)라고 표현할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둘 :『무한한 빛이신 그분 앞에서 인간정신은 「어둠」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다』라고 말한 토마스 머튼의 고백은 하느님 앞에서 발가벗은 인간의 자기 실존에 대한 「깨달음」이 아닐수 없다.「무 (無)」로써 표현할수 있는 「어둠」이라는 낱말보다 더 적절하게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의 자기실존을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이다. 살아계시고 끊임없이 창조하시는 야훼 하느님은「나자렛 예수」라는 구체적 인물을 만남으로써 이루어 진다.이 예수와의 만남을 통하여 믿음을 고백했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모두 하느님 앞에서의 자기실존에 대한 어둠의 체험 즉 무(無)의 체험을 통해서 신앙의 극치에 이르고 있는것이 아닐까. 평범한 신앙인은 물론 위대한 성인들의 체험도 하나같이 그 절정에 이른 어둠의 체험에서 신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역사상 예수를 직접 만났던 사람들, 그들도 예외없이 자기실존에 대한 이 깨달음을 통하여 형언 할수없는 은혜의 순간을 맞이했고, 그들의 이 어둠의 체험은 빛으로 충만되었고, 깊고 깊은 밤이 낮이 되었고 믿음은 더큰 깨달음으로 이어져 예수와 함께「예수의 길」을 걷는다. 세리였던 「마태오」가 그렇고, 창녀였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렇고 예리고의 맹인거지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가 그렇지 아니한가.
▩셋 : 우주의 신비를 벗겨내는 인간의 위대함을 얘기하지만 지금까지 그 누구도 스스로 자기 육안(肉眼)으로 직접 자기 얼굴을 본 사람은 없다.사람은 누구나 거울과 같은 반사매체를 통해서 자기얼굴을 본다.인간의 외적조건이 이러하다면 하물며 인간의 내면세계는 말 할것도 없이, 사람은 누구나「만남」을 통해서만 자기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그리고 사람은 한 눈으로만 「거리」를 측정할 수 없듯이 우리의 내면 세계의 눈도 결국 「마음의 눈」을 지닐 때 만 이 자기의 실존의 위치를 바로 알아볼 수있는것이 아닐까. 이러한 「영혼의 눈」으로 「나자렛 예수와의 만남」이 이루어진 그 대표적 믿음의 세계를 우리는 마르코복음 11장 46절 이하에 소개되는 「예리고 소경의 치유사화」에서 볼수 있다.
▩넷 : 권세 있는 자들과 많이 배운 사람들, 소위 내노라 하는사람들이 붐비던 고도(古都) 예리고의 거리를 바람에 날리는 쓰레기 처럼 그들의 발치에서 구걸하던 맹인거지, 바르티매오. 그에게도 예외없이 「나자렛 예수의 소문」은 들려 왔을 것이다.
「너희들 모두가 한 형제이니 서로 사랑하는 것」과 「하늘나라가 가난한 자들의 것」이라는 이야기를 그도 듣고 있었을 것이다.
뭇 사람들의 멸시와 학대를 통하여 오는 고난과 고통의 의미를, 어두운 절망의 골짜기를 거쳐 오면서도 인간만이 지닐수 있는 끝없는 희망의 불씨를 간직하며 살아왔을것이다. 이제 그의 내면의 불씨에 「나자렛예수」라는 이름으로 하여 뜨거운 불길이 솟아나게 된 것이다.살아 생전에 그를 만나 그의 따뜻한 목소리와 그의 손을 잡아 보고 싶은, 그 만남의 원의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다. 그는 온갖 주위의 만류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린채 나자렛 예수를 향해 돌진했다.
『그를 막지 말라…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합니까』 (49절)하고 마침내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랍부니 (선생님) 제가 다시 볼수있게 해 주십시오』 (51절)하고 그가 말하자 『예수께서는 「가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했습니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는 다시 보게 되었고 예수를 따라 길을 나섰다』 (51~52절)고 마르코사가는 우리에게 전하고있다.
나자렛 예수를 향해 「다웟의 아들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47절)라고 한 그의 외침은 위험 천만한 것이었다. 이것은 나자렛 예수가 곧 「메시아」라는 고백이기 때문이었다. 유대인을 지배하던 로마인들과 유대인 지도자들, 그들을 의식하던 모든 군중을 당황하게 만든 사건이 아닐수 없었다.그러나 그는 소리치며 달려 갔고, 자기의 육신을 마지막으로 지켜주는 「겉옷을 내동댕이치고 예수를 향해 벌떡일어나 갔다」 (50절)고 한다.
▩다섯 : 맹인거지 「바르티마오」는 예수께「제가 다시 볼수 있게 해주십시오」하였으니 그는 태생 소경이 아니었을것이다. 세상살이에서 언젠가 눈먼 사람이 된것을 암시하고 있는것이다. 그의 원의는 단순히 육안(肉眼)의 개안(開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와의 만남, 그 필사적인 결의는 마침내 그의 눈을 뜨게 했고 나자렛 예수안에서 메시아를 볼 수 있는 제2의 눈인 영혼의 개안(開眼)으로 깨달음에 이른 것이라 할 것이다. 불길속에 녹아드는 흰 눈송이 처럼 흔적도 없이 자신의 실존이 무(無)로 돌아가듯, 예수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그는 이루어 낸 것이다. 빛을 향한 열망, 그것은 「노력하는 한 인간은 괴로워한다」는 파우스트적 절망을 뛰어 넘어 「노력하는 것이 곧 깨달음」이라는 불가적(佛家的)태도에 더 가까운 것이라 해야 할것이다.
불을 발견 해 낸 최초의 인류가 불씨를 당겨 황홀하고 흥분된 설레임으로 언 몸을 녹였듯이 추위가 몰려오는 이계절, 우리도 저 예리고의 맹인거지와 같은 「영혼의 불」을 당겨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황량한 겨울벌판 같은 이 세상살이에서 우리도 예수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길을 떠난 「바르티매오」와 같이 뜨거운 사랑의 불길로 자신을 소진시켜 이 캄캄한 밤을 밝히고, 생명과 부활의 아침을 앞당겨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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