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도들은 성신을 받자『온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마르16, 15)는 전교사명을 실천에 옮기게 된다. 먼저 베드로의 설교로 3천명이 개종하고 이어 5천명이 개종했다. 이리하여 예루살렘에 주님의 사도들과 제자들, 새 개종자들로 구성된 최초의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 공동체는 사도들의 지도를 받으며 한 마음 한 몸이 되어 서로 가진 것을 나누고 또 날마다 성전에 모여 기도를 드리고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었다. 신자수가 증가됨에 따라 사도들의 협력자로 스테파노를 위시한 7명의 부제가 선출되었다.
한편 사도들의 성공적인 설교에 놀란 유대교의 두목들은 베드로와 요한, 그밖의 사도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심문을 했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후 설교를 해서는 안된다는 조건으로 훈방(訓訪)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오히려 하느님께 복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5, 29) 하면서 복음의 설교를 계속했다.
이무렵(33/34) 박해가 일어나 스테파노가 순교했고 그러자 신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기 시작했다.
박해는 스테파노의 처형에 동참했던 사오로에 의해 계속되었고, 무엇보다도 42년경에 일어난 박해는 사도단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어모든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박해로 대(大 또는 長) 야고보 사도가 순교하고 베드로 사도도 다시 잡혔으나 천사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풀려나 예루살렘을 떠났다. 그가 떠난후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주교이고 주님의 형제로 알려진 소(小 또는 次)야고보 사도도 순교했다(62/63). 이로써 예루살렘 교회는 그 중요성을 잃고 만다.
한편 거듭된 박해로 예루살렘을 떠난 신도들과 사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했고 이리하여 안티오키아에도 교회가 탄생하게 된다.
바오로와 안티오키아 교회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던 무렵(42/43) 바오로 사도도 안피오키아로 와서 바르나바 사도를 도왔다.
그간 사오로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해 마지않았었는데, 그러나 그들을 체포하러 다마스커스로 가던 도중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을 보고 즉시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 다음 바오로로 개명하고 일약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
당시 안티오키아 교회는 여러가지 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안티오키아는 당시 로마ㆍ그리스 문화의 중심 도시의 하나였다. 이러한 도시에 처음으로 이방인이 주축이된 교회가 세워졌고, 뿐더러 그 신도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며 독립된 종교단체로 나타날만큼 일반의 주목을 끌고 있었다 이제 바오로를 맞이한 안티오키아는 그의 세번의 전도여행을 통해로마ㆍ그리스 세계로 향하는 거점구실을 하게 된다.
바오로는 첫번째 여행(45/49)에서 소아시아와 키프로스섬에 복음을 전하고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이때 그리스도교를 유대화하려는 일부 유대 교인들이 구원을찾으려면 이방인도 모세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논쟁을 일으켰다(안티오키아 논쟁). 바오로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바르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을 올라갔고, 예루살렘에서는 그 문제때문에 사도회의가 개최되었다 (49/50). 바오로는 이방인을 대변했고, 야고보는 유대인을 대변했다. 회의는 바오로에게 유리하게, 즉 이방인은 율법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끝났다.
다만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등의 약간의 조건이 첨가되었다(야고보 조항).
그후 바오로는 또 두번의 전도여행을 했다. 두번째 여행에서 (50/52) 그는 다시 소아세아를 방문하고, 거기서 유럽으로 가서 고린토 등 여려 교회를 세웠고, 세번째 여행에서는 (53/58) 다시 소아시아와 유럽의 교회들을 찾아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 바오로는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2년간 체사레아에서 감금생활을 했다. 바오로가 로마시민의 자격으로 황제에게 호소하자 그는 로마로 보내져 거기서 순교했다(64/67). 사도행전은 바오로가 2년간 로마에서 감금생활을 하면서 계속 복음을 전한 이야기로 끝난다.
그러나 그간 스페인까지 갔다가 돌아와 순교했을 것이라는 설도있다.
베드로와 로마교회
로마교회가 언제 시작되었고 또 누구에 의해 창설되었는지 확실하지가 않다. 다만 교회의 가장 오랜 전통은 그 창설을 베드로에게 돌리고 있다. 그리고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 (57/58) 로마교회는 이미 번창하고 있었다.
베드로는 벌써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다. 그는 마티아 사도를 선출케 했고, 처음으로 설교를 하고, 기적을 행했고 또 사도회의를 주관했다.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와(42/43) 어디로 갔는지는 확살하지가 않다. 그러나 그가 비록 지속적인것은 아니었을지라도 (50년경 예루살렘에 다시 와서 사도회의를 구관했기 때문) 한때 로마에 체류했던 사실은 그가 바빌론(당시 로마의 별칭)에서 그의 편지를 쓴 사실 (63/64)에서 입증된다. 그리고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하고, 그곳에 묻혔다는 교회의 오랜 전승 역시 최근에 실시된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 발굴작업에서 고고학적으로도 입증되었다.
교회의 가장 오랜 전승이 베드로의 로마 체류와 로마에서의 순교(64/67, 바오로와 함께)를 이론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 사실로보는 근본 이유는 베드로의 교황직 때문이다. 만일 베드로가 로마교회의 첫 주교가 아니었다면 초대교황이 될수 없고, 그렇게 되면 그후의 교황들도 베드로의 후계자가 될수 없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바오로 다음으로 중요한 사도는 요한이다. 그러나 그에 관해서는 그가 파트모스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에페소에서 사망했다는 2세기 말경의 증언이 전해질 뿐이다.또 토마 사도가 인도에 복음을 전했다는 주장도, 그 토마가 8세기의 다른 토마였다는 주장도 있고보면 전설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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