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 지난 10월 우리사회에 큰 파문을 던졌던 일련의 사건들은 아직도 우리의 가슴속에 큰 충격으로 남아 있다.
영농후계자로 뽑혔던 청년이 술집 앞에서「촌놈」이라는 이유로 박대를 받자 홧김에 불을 질러 16명의 무고한 목숨을 빼앗은 사건과 실명에 가까운 신체적 조건과 배운 것 없이 일터로 전전하던 노동자가 이 사회의 대한 복수심으로 여의도 광장에서 살인운전으로 무차별 사상자를 낸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사건을 두고 다시 한번 사람들은 「이제 세상이 갈 데로 다 갔다」면서 낙담과 체념으로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사건의 두 젊은이가 이 시대의 소외계층으로 대별되는「농민」과「노동자」라는 점에 있어서 이 사건은 우리 사회의 치유되지 않은 깊은 상처가 어딘지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이 사건을 두고 어느 일간신문 칼럼기사에서는 정치인, 국회의원, 재벌, 그리고 대학교수에 이르는 이른바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벌이는 각양각태의 부정과 비리에 분노하고 개탄하면서 사람들은 『윗 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라고 이 사회의 모든 범죄를 자기합리화 내지 무감각하게 하도록 한다고 했다. 아울러 그 필자는 이러한 도덕적 체념은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지식인들이 무규범 사회풍토 조성에 더욱 앞장서 가는데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아랫물이 맑아져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참으로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그야말고 모든 기준과 규범이 혼동상태에 이르고 있음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아랫물이 먼저 맑아져야 하느냐」 아니면 「윗물이 먼저 맑아져야 하느냐」는 도덕적 원인론을 따진다는 것 자체가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는 괴변이 될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물은 아래로 흐르고 있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가 아닐까.
■둘 : 나자렛 예수가 살던 그시대에도 「시대의 악함」이 당시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에게 있음을 예수는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이 사회에 대하여 더 큰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이었던것이다.
위에 열거한 두 사건과 동일한 시기에 있었던 또 하나의 사건으로 이 시대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모두에게 더 할 나위없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일깨웠던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곡예단 소녀, 심주희양의 사건」이었다. 치를 떨정도로 잔인한 이 사건은 인간성 그 자체에 실망과 좌절을 안겨 줄 만큼 이 세상에 악의 존재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 아닐수 없다. 결손가정에서 네살 난 어린나이에 어느 곡예단 대표에게 입양되어 8년이란 긴 세월을 동물 보다 더 못한 조건에서 갖은 학대와 고문을 받으며 사육장에 갖힌 짐승처럼 성장억제를 위해 침식의 통제를 받으며 살아온 12세의 소녀, 그녀를 앞세우고 밤무대에서 돈벌이를 해온 짐승의 탈을 쓴 인간이 우리 가운데 버젓이 살아 갈수 있다는 것은 이 나라 모든 국민과 오늘 이 나라를 다스리는 위정자들 모두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은 두 말 할여지가 없을 것이다.
「눈먼 돈」으로 모든것이 움직여 질 수 있는 사회풍토, 「돈이면 된다」는 사고방식으로 온세상 사람들이 미쳐돌아가는 사회, 황금만능주의로 타락된 사회 속에서만 일어 날수 있는 일이 아니고 무엇일까. 수백수천명의 어린 소녀들이 증발되는 「인간증발」사회를 두고 그 누가 「자유민주, 법치국가」라고 감히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셋 : 지난 80년대 초 우리나라 어느 주교님께서 서양의 어느 교회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은 기독교정신의 힘으로 그나마 버티고 있다」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전체인구의 25%를 윗돌고 있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 과연 그들의 힘으로 이 나라는 버티고 있는것일까.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그러한 긍지를 가질만 한가?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 스스로가 할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본다.
「성령충만」을 외쳐대며 멀쩡한 사람을 마귀들린 사람으로 몰아세우고, 한맺힌 사람들에게 종말의 위기감을 고조시켜 금품을 갈취하고 자산을 탕진케하는 기독교계 신흥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그래도 역사성과 전통성을 지닌 그리스도교 역시 돈없는 사람이 근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물질로 비대 해진 오늘, 이 땅의 그리스도교의 모습은 자기 몸 하나도 간수하기 힘든 비만증에 걸린 유한마담과 다를 바가 무엇일까. 어느 통계에서 나온 근거인지는 알수 없지만 「한국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세계에서 가장 열심하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과연 그 열심은 그리스도교적인 것일까. 「한분이신 야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신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이 모든 번제나 (친교)제사 보다 더 낫습니다」 (마르12, 32~33참조)라고 예수께 고백한 어느 율사의 고백과도 같이 우리의 믿음은 과연 「하느님의 사랑」에 근거한 것일까. 아니면 6백13개의 율법조항으로 온갖 금령과 명령으로 철저히 인간을 구속하던 예수시대의 유대교와 같이 오늘 우리들도 「경신례 안에서 요구되는 규정과 명령을 지킴으로써 사랑의 계명을 충족시키는 경건주의로 종교적 집단이기심」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개신교와 가톨릭이라는 큰 담장은 고사하고 우리 가톨릭 안에서 교구와 교구, 수도회와 수도회사이에 본당과 본당 사이에 그리고 본당공동체 안에서 계층과 계층 사이의 틈은 날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고 보는것은 필자만의 견해가 아닐것이다.
「교회를 위해서」라는 호교론적 미명 아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자기안보를 위해 끝없이 자기보호막을 치고 있는 것이아닐까.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그리스도교 윤리의 핵심인 이 두 계명을 이분화하려는 「경건주의」는 「하느님의 사랑」이 이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정의」로써 드러난다는 것을 망각하거나 이를 거부하는 것이라 본다. 소위 은혜가 충만하다는 종교행사에는 구름같이 몰려가는이들도 「정의」라는 말만 나오면 고개를 돌려버린다고 한다면 이러한 성직자와 신도들의 열심을 그리스도교적 신앙이라 말할 수 있을까.
■넷 :「정의가 없는 곳에 평화가 없듯이 정의가 없는 곳에 하느님의 사랑은 발붙일 곳이 없다」. 그러므로 정의가 없는 사랑을 얘기하는 교회가 있다면 하느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그가 무신론자라 하더라도 정의로써 사랑을 실천하려 한다면 진리와 진실을 가장 소중히 여기시는 야훼 하느님은 바로 그곳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진실로 사람은 누구나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볼수 있는 모상이기 때문이다.
물은 아래로 흘러 바다로 간다. 하느님의 사랑도 「인권옹호」와 「인권신장」의 보호자요 감시자로 이 세상에 불리움을 받은 교회지도자들로 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한아름 선물을 안고 남대문 경찰서 정문을 나서는 곡마단 소녀 심주희양의 그 울먹이는 모습을 보면서 이 시대의 「방관자」로서의 자책을 하느님 앞에 고백하는 것은 유독 필자만의 감정은 아닐것이다. 인간의 품위가 실추되고, 인간의 가치가 유린 당하는 이 시대의 우리 모두는 「억눌린자들」의 보호자요 감시자로서 하느님의 불리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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