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활동하신 그 유명한 가파르나움 선교는 야이로의 딸 소생 이야기로 끝나고 어려서 자라난 고향을 방문하셨다.이 방문으로 하느님 나라 전교활동을 일단 마감하는 동시에 앞으로 있을 당신의 수고수난과 동포들의 손에 의한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는 서장을 열게 된다.
예수께서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신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첫 번째는 고향사람들의 환영을 받은 방문이었고(대목 42참조) 두 번째는 배척을 받은 방문이었다. 마르꼬와 마태오는 이 방문을 몇 번째라는 말없이 갈릴레아 전도이후에 놓았고 루가는 갈릴레아 전도시작에 놓았다. 그런데 루가에 따르면 예수께서 고향을 방문하시자 고향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다가(4, 16~22)갑자기 그들은 예수를 경멸하는 말로 대하고 불신과 분노가 터져 폭력행사까지 서슴치 않는다(4, 23~30). 이 기술방법은 납득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라그랄쥬) 루가의 기사를 두 번의 방문으로 나눈다.
하여튼 예수께서 가파르나움 등지에서 하느님나라를 설파하시며 많은 기적을 나타내 보이신 다음 고향땅 나자렛으로 가셨다. 제자들도 뒤따랐다. 언제나처럼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지난 번에는 예언서의 말씀이 당신에게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다. 이번에는 강론내용이 언급되어있지 않고 다만 고향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큼 지혜를 발휘하셨다고만 쓰여져있다. 이번에는 경탄의 놀라움이 아니고 시기심에서 나오는 언짢은 놀라움이다.
그들은 이미 예수께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고 예수로 인하여 그를 따르는 자와 반대하는 자로 갈려져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를 반대하는 자들은 유대아인들의 지도급 인사들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도 반대하는 편에 들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지혜와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고개를 돌려 믿지 않기로 작정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출신성분이 비천함을 굳이 들추어냈다. 그는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마리아의 아들,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등과 형제지간이 아닌가라고 불신의 구실을 찾았다.
마리아의 아들이란 말은 신약성서를 통틀어 여기서 한번만 나온다. 유대아의 풍습에서 누구를 지칭할 때 반드시 아버지이름을 부르며 그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 어머니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모욕을 주는 언사이다. 물론 그 때의 예수의 양부 요셉은 세상을 떠나고 없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요셉의 아들이라고 해야 한다. 첫번째 방문 시에는 요셉의 아들이라고 호칭했다.(루가4, 22). 여기서 거명된 형제들은 직업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동향인들에게는 한낱 졸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한 동네에 살고 있는 누이들까지도 들먹였다. 이 여자들이 누구인지는 전혀 알 수 없다.(예수의 형제들에 관한 토론은 다음호에)
예수께서는 이들이 믿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다. 이 표현은 당신을 믿는 사람들을 보시고 가상히 여기신 표현과 대조된다.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동족이 믿지 않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예수께서는「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격언을 말씀하셨다. 아마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일 것이고 이 말씀은 제자들도 고향을 버리고 이국땅에서 전도해야 할 운명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예언자 예레미야도 자기 고향사람들의 음모와 살해기도를 당하였다(예레11, 18~23). 이 표현은 그제나저제나 타당한 명구로 통한다. 외경인 토마스 복음서에는「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고 의사는 자기 친지들을 고치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비슷한 뜻으로 헬렌 문화권에서는「철학자는 고향에서 궁지에 빠진다」라는 격언이 있었다.
이와 같은 반대기운을 알이 차리신 예수께서는 악의에 찬불신자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믿는 이방인들이 구원의 은혜를 받을 것임을 선언하셨다.「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라고 너희는 빈정대겠지만 너희는 정녕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책망을 하셨다. 그 동족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네 자신이나 살려보아라」고 비아냥거렸다. 주님을 배신하고 헷갈린 길을 걷던 이스라엘이 구원에서 제외되고 그 대신 이방인이 하느님의 혜택을 받은 사실은 구약성서에도 있는데 그들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사실을 지적하셨다.
사렙다의 과부 이야기(열왕 상17, 9~24)에서 사렙다는 티로와 시돈의 중간에 있는 마을로서 티로와 시돈은 이방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3년반 동안의 기근은 박해와 재난의 기간을 상징한다(다니7, 25:12, 7:묵시11, 2:12, 6과 14:13, 5). 시리아 사람 나아만 이야기(열왕하5, 1이하)에서 나아만은 문둥병자였고 많은 이스라엘사람들을 제쳐 놓고 유독 그만이 예언자 엘리사의 은덕을 입고 병이 나았다(열왕7, 3).
예수께서 고향사람들에게 기적을 베푸실 수 없었던 것은 믿지 않는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이제 구원의 손은 온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뻗쳐질 것이다. 고향사람들은 화가 치밀었다. 본색이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벼랑에서 떼밀려고 하였다. 예수의 수난(受難)을 예고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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