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의 원인
마침내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다.
박해가 일어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첫째는 주님의 예언대로 『교회는 나 때문에 무조건 박해를 받을 것이다』 (마태5, 11)는 종교적인 이유였다.
다음은 로마 백성들이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증오심에서 중상과 모략으로 박해를 일으켰고, 특히 황제들이 교인들을 국가의 적으로 몰아 폭력을 자행하는가 하면 황제숭배 의식에 공식적인 참여를 강요함으로써 교인들의 충성심을 시험하려 한 때문이었다.
박해는 64년에 시작되어 신앙이 허용되는 313년까지 3세기에 걸쳐 진행되였다. 3세기 동안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사실인즉 249년 동안이고 또 그간에도 늘 박해가 지속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의 박해기간은 129년 동안 있었다.
그간의 박해수를 10회로 계산하는 것이 교회의 오랜 전통이다. 그것은 아마 구약시대에 있었던 이집트의 10번의 재난을 암시하려한 때문인 것 같다. 실제로 그것은 박해를 일으킨 주요 황제들을 10명 정도로 볼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250년을 전후해서 전기를 지역적인 소박해 시기로, 후기를 전반적인 대박해 시기로 구분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 같아 여기서는 이러한 구분방법을 따르기도 한다.
소박해시기(64~250)
이 시기에는 아직 전반적인 박해령이 없었고, 그래서 박해도 지역이나 개개인에 국한된 작은 박해들이었다.
최초의 박해는 네로 황제때(54~68) 일어났다. 64년 네로는 로마 시민들이 그를 로마시의 방화범으로 몰려 하자 도리어 방화죄를 교인들에게 전가시키고 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를 위시해서 많은 교인들이 희생되었고, 박해 자체도 그후 네로란 이름이 폭군의 대명사가 될만큼 매우 잔인했다.
도미시아누스 황제(81~96)도 교인들을 국가의 적으로 몰아 다시 박해를 일으켰다. 그후에도 교인들은 수시로 지방총독에게 고발되었으므로 늘 죽을 위험에 처해 있어야했다. 한편 지방총독들은 아직 교인들을 다스릴 일정한 법령이 없었으므로 그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입장이 난처했다. 이런 상황에서 비티니아 총독 플리니우스는 112년경 트라야누스 황제(98~117)에게 서한을 보내고 교인들을 다스릴수 있도록 구체적인 지침을 요구했다. 이에 대한 트라야누스의 회신은 이러했다.
『교인들을 찾아내지는 마시오. 고발된 자는 처벌하되 배교하고 행동으로 증명하면 용서하시오. 익명의 고발은 받아들이지 마시오』
트라야누수의 이러한 지시는 그후 박해의 원칙이 되었다. 그런데 지시 자체는 매우 논리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교인이 죄인이라면 고발을 기다릴 것 없이 추적해야 하고 아니라면 고발되어도 처벌하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다. 과연 그후 저명한 교회저술가인 테르툴리아노는 『교인들이 죄인이라면 왜 체포하지 않는가. 그들이 죄인이 아니고 찾아낼 필요가 없다면 왜 그들을 처벌하는가』이렇게 그 모순성을 신랄하게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그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93~211) 막시미누스 트락스(235~238)황제들때 박해가 재연되었다. 세베루스 때는 그리스도교를 근절시키려 함으로써 벌써 전반적인 박해를 예고나 하듯 심상치 않은 조짐마저 보였다.
대박해 시기(250~313)
이때부터 조직적이고 전반적인 박해가 시작되는데, 그것은 데치우스 황제(249~251)가 국경지대의 위협과 기근 등으로 곤경에 빠진 제국을 구하기위해 전통종교를 부흥시킨다는 명분아래 그리스도교를 전멸시키고자 칙령을 선포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이 칙령에서 데치우스는 로마의 신(神)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증명서를 교부 받도록 지시하는 동시에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벌금과 유배, 투옥과 사형 등으로 위협했다.
순교자가 많이 나왔다. 그러나 소위 배교자(lapsi)도 많았고 그중에는 주교도 있었다. 배교자 중에는 실제로 제물을 바친 사람들(Sacrificati)이 많았고, 개중에는 향만을 피운 사람들(Thurificati)이 있었는가 하면 돈을 내고 증명서를 얻어낸 사람들(Libellatici)도 있었다.
데치우스의 박해는 251년 그의 사망으로 끝났으나 이어 발레리아누스 황제때(253~260)재연되었다. 이 황제는 박해를 위해 두번의 칙령을 반포하고(257과 258) 무엇보다도 성직자를 가혹하게 다스렸다. 그는 카타콤바의 출입까지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 박해도 260년 발레리아누스가 전사함으로써 끝나고 그후 40년 동안은 평온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284~305)에 이르어 피비린내 나는 박해가 일어남으로써 그리스도교와 일대 결전이 벌어졌다. 그는 처음에 그리스도교에 호의적이었으나 곧 이교 광신자들의 사주는 받고 303년과 304년 2년동안 무려 4개의 칙령을 반포하고, 모든 교회의 파괴, 모든 성직자의 체포와 제물 봉헌을 지시하는등 가장 모진 박해를 가했다.
이 박해는 콘스탄티누스대제의 아버지 클로루스가 지배하던 갈리아지방을 제외하면 제국 전체에 미쳤고 특히 동방과 이집트지방이 더욱 심했다. 305년 디오클레시아누스의 폐위에도 불구하고 동방에서 박해는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지속되었다. 갈레리우스(305~311)는 311년까지 박해를 지속하다가 결국 죽기직전에 종교자유을 허용하는 관용령을 발표했으나 막시미누스(308~313)는 313년까지 박해를 강했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콘시탄트수스 부자의 영향으로 이미 박해가 3백5년에 끝나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306~337)는 로마를 정복한 막센시우스(306~312)와 싸우기 위해 로마로 쳐들어가 로마 부근 밀비오다리에서 312년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그는 이듬해 동방황제 리치니우스(308~324)와 밀라노에서 만나 그리스도교의 신앙자유를 전국에 허용하는 유명한 밀라노 칙령을 반포했다.
열세에 놓여있던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이 표로 이겨라』는 말과 함께 하늘에 나타난 십자가를 보고 또 그날밤 그에게 발현한 그리스도의 지시에 따라 기 꼭대기가 「그리스도」단어어의 머리 두 글자(그리스어)를 중심으로 원모양으로 장식된 십자가 군기(軍旗)를 내세우고 전진한 덕분이라고 한다.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이다. 어쨌든 콘스탄티누스의 이 개선은 세계사적인 의미를 지니는 큰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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