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 교회력으로 11월은 한해가 저물어가는 마지막 달이다. 우리교회는 이 달을 위령성월로 정해놓고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언젠가 닥쳐 올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깊어가는 이 계절, 창 밖의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가장 민감하게 변해가는것이 바람소리인듯 하다. 초가을 풍요롭던 금빛햇살 아래 부드럽고 너그러운 어머니 손길 같은 바람도 계절 깊어 가면서 그 숨결이 거칠어지고 있다.
한 생애를 살고 가는 사람의 마지막 숨결 같이 황량한 도시의 거리를 휩쓸고 지나는 저 거친 바람에 실려가는 계절의 흐름 속에서도 그 어느 끝을 향한 몸부림이 있는 것일까.
■둘 : 신음하는 저 자연의 몸부림과도 같이 오늘 우리의 삶도 끝없는 격동과 흥미의 와중 속에서 괴로워 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격동과 혼미」라는 말이 사라진 시대는 없었다고 말할수 있겠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만큼 심각한 시대는 일찌기 없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통감하고 있다.
이 심각성이란 한마디로 살아 있는 모든 것에「죽음의 검은 손길」이 닿아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독(毒)이든 공기로 숨을 쉬고 독이든 물과 음식을 먹고 마시며 살고 있다.
오늘날 지구촌의 남과 북의 경제적 불균형은 몇몇 가진나라들의 풍요 속에 극단적 빈곤을 낳았고, 죽음과도 같은 가난 속에 인류의 대부분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날로 심각해 지는 기후의 대변동과 지구축의 변동, 오아시스의 사막화 현상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세계적 위기가 가속화되어 간다는 징후는 명백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다가올 불행을 걱정하지만 그 누구도 이렇다 할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남북분단의 끝없는 냉전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떠한가. 물신숭배의 허황된 천국을 약속했던 군부독재 아래 만연된 정치적 기만과 매스미디어의 대중 조작에 시달리며 우리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그 결과는 참으로 엄청나다고 할 것이다. 우리의 삶 깊숙이 침식된 갈등과 좌절, 원한과 증오, 불신을 어찌 산업화의 과도기적 현상이라고만 치부하며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을것인가. 이른바 우리는 인간성을 상실해 가고 있으며, 생명력을 소진 당하고 죽음을 강요 당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셋 : 우리시대의 신학자요 영성가였던 로마노 과르디니, 그는 온 세상이 악의 소용돌이 속에 미쳐가던 독일의 나치시대에 뭇 사람들이 목청을 높여 위장된 진실의 가면을 서로가 서로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할때 유독 낮은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넸다. 『인간의 참다운 인격은 사랑으로 인하여, 「자신으로」부터「너」를 향해 나아가며 너를 내 안에 받아 들이는「대화」안에서만 존재한다』고 했다. 『너를 향한 관계안에 존재하지 않는 나는 없는 것과 다름이 없다. 「너와나」의 이 관계가 정립 되지 않으면「나」가 병들어 간다』고 그는 말했다.
그가 바라 본 우리시대의 불행은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는 인가의「이기적 소외감」에 있다고 본 것이 아닐까.
『나의 상대를 내가 순수히 받아 들일때 만이 나 역시「순수한 나」가 될 수 있으며 너와 내가 주체와 객체로 변하여「나와 그」의 관계로 떨어 질 때 진실한 만남을 파괴 되고, 우리의 삶은 문제화 되고 우리의 존재의 공허하고 불확실해 진다』고 그는 또한 말했다. 로마노 과르디니는 물론 우리시대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과 마르틴 부버가 한결 같이「너와 나의 참된 만남」이 깨어진 데서 현대의 문명의 위기를 말하고 있음은 무슨 까닭일까.
■넷 : 그리스도교의 복음이란 이 세상에서 이러한 참된「너와 나의 만남」을 이루어 내는데 있다고 할 것이다. 참된 너로서 내가 너를 만날 때「우리」가 될 수 있듯이 사랑으로 무장된 정의에 대한 감각을 사실 한다면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보프의 말대로『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한 채 어떻게 출애굽의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목수의 아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그러므로 교회가 가장 위험에 떨어지기 쉬운 것이 마귀가 아니라 오히려 종교적 독선과 독단의 상징인 「바리사이즘」에 빠지는 것이라고 예수는 말씀하시고 계신다. 「하느님의 뜻」과「하느님나라」를 위해 일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의 뜻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소심하고 소극적인 폐쇄적 경건주의야 말로 하느님나라를 위한 복음 선포에 가장 큰「비극적 요소」라고 예수는 말씀하신다. 예수시대에 사회적, 종교적으로 기득권을 지녔던 상층계급에 속했던 이들 바리사이들은 자신의 도덕적 경건함을 내세워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의 만남으로 새로운 삶을 탄생시키는 그리스교적 회개를 거부한 자들이고 민중의 응어리진 한(恨)을 어루만져 주기는 커녕 오히려 무한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자기 임의대로 축소시키고 미침내 하느님의 자비를 거부하는 자들로서 예수의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마르12, 38~40 참조).
「과부들 가산을 등쳐먹는 자들」로 지칭되는 위선자들로서 복음적 해방과 기쁨을 선포하기 보다는 끝없이 죄에 대한 강박관념을 강조 함으로써 가난 한자들의 몫을 갈취하고 하느님의 자비에 신뢰하도록 인도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들에게 실망과 좌절을 안겨다 준 사람들이라 할 것이다.
자기 자신은 물론 뭇 사람들에게 비인간화의 길을 열었던 잘못된 권위에 자기환상을 지닌 보수주의자들과, 사랑이 없는 믿음으로 이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위선으로 자신을 포장해낸 경건주의자들, 이들의 오만함과 자만은 정의로써 이 세상에서「작은 자들」을 위해 복음적 깃발을 치켜들어「살아계신 하느님」의 손발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하느님의 손 발을 묶어 사랑과 진리를 외면하게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살아가는 나자신을 포함하여 오늘 우리교회는 과연 우리자신의 연약함과 모자람, 죄와 더러움을 솔직히 하느님 앞에 고백하면서 그분의 자비를 구하고 있는 것일까. 사제로서 수도자로서의 내 삶을 돌이켜보면 나는 부끄러움이 앞설 뿐이다. 「나는 잘못을 감추지 않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 자신을 스스로 고발하면서도 실망하지 않고, 진실로 하느님을 만남으로써 나는 하느님의 자비에 회개로서 평화와 기쁨을 잃고 있는가. 그리하여 죄인들의 공동체 안에서 사제로서 나 자신도 깊이 죄인으로서의 동료의식을 가지면서 하느님과 이웃에게 있는 그대로의 겸손을 지니고 있는가」라고 스스로 자문해본다. 동전 두닢을 헌금한 가난한 과부와 같이 진실한 나눔으로 있는 그대로 꾸밈없는 겸손한 만이「너와 나의 만남」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만남이 하느님과 이웃,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과 이루어질 때 비로소 이 세계는 온전히 구원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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